- 알츠하이머 앓는 시한부 여작가
- 한국인 작가 지망생과의 연애담
- 소설 집필 힘쓰며 애제자 삼아
- 죽음 앞두고 흔적 남기기 분주
연애 소설로 명성을 얻은 중년의 소설가 아야미네 료코는 대학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틈틈이 다음 작품을 집필한다. 원고에 만족하지 못하고 세절기에 분쇄해버리는 나날의 연속. 학교 근처 술집에서 그녀의 잃어버린 만년필을 찾아준 것을 계기로 료코는 한국인 유학생 소찬해를 알게 되고, 그에게 자신의 강아지 산책을 맡기면서 조금씩 가까워진다. 조기 알츠하이머 증세를 보이며 머잖아 작가로서 죽음을 예감한 그녀는 찬해의 도움을 받으며 소설을 완성하고, 작업이 지속될수록 둘의 사이는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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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나비잠’의 한 장면. BIFF 제공 |
정재은 감독의 ‘나비잠’은 우선 작가의 죽음에 관한 영화다. ‘히로시마 내 사랑’(1959)의 시나리오를 쓴 마르그리트 뒤라스가 생애 말년에 연하의 문학도와 사귀었던 연애담을 그린 ‘이런 사랑’(2001)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역력하지만, 이 영화는 남녀 사이 감정의 밀고 당김보다 남아있는 시간 동안 삶의 흔적을 정리해나가는 료코의 모습에 비중을 두고 담담하면서도 섬세한 터치로 담아낸다. 생명줄과 같은 집필 도구를 잃어버리는 데서부터 암시되는 작가로서의 위기는 학생들이 과제로 써온 글을 모조리 세절기에 갈아버리는 장면에서 상실되는 기억의 은유로 이어지며, 강아지를 잃고 고장 난 수도꼭지 앞에서 혼자 어쩔 줄 모르는 모습에서 점차 망가지고 지워지는 료코의 처지가 암묵적으로 드러난다.
찬해의 재능을 눈여겨본 료코는 소설 집필에 도움을 받으면서도, 선생의 입장에서 언젠가 피어날 학생의 가능성을 일깨워주기 위한 가르침과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중견 여성 작가와 작가 지망생 청년 간의 농밀한 연애담은 ‘파인딩 포레스터’(2000)나 ‘일 포스티노’(1994)와 같은 사제(師弟) 관계 이야기의 멜로 드라마적 변주이기도 하다. 료코는 연인의 감정으로 찬해를 대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이 머지않아 사라질 과거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자 다음 세대의 문학을 이어갈 작가 찬해를 위해, 지금을 사는 자신이 무엇을 남겨주고 떠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선배이자 기성세대로서 료코의 면모가 그려진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통속 멜로를 넘어서는 엄청난 위력의 감동이 휘몰아친다.
사람의 인생이란 죽는 날까지 지속하는 ‘소멸’의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살아있는 동안은 자신이 존재한 흔적을 세상에 남기고 가는 ‘생성’의 과정이기도 하다. 먼저 살아간 이들의 역사가 축적된 바탕에서 현재 사람들이 삶을 누리고, 그것이 또다시 미래의 세상과 사람들에게 이어진다. 동네 도서관으로 바뀐 료코의 집은 동네 아이들이 책을 벗 삼는 마을의 휴식처가 되고, 옛 모습 그대로인 서재는 과거 둘만의 추억이 소중한 시간의 비밀로 남아 깃들었다. 그처럼 시간의 결이 켜켜이 쌓이며 삶은 이어지고, 다시 또 이어지길 거듭한다.
‘나비잠’은 관객에게 시간의 윤리를 묻는다. 오늘 우리의 하루는 미래에 어떤 흔적으로 남을 것인지, 다음 시대의 사람들에게 현재의 우리는 어떤 것을 남겨야 할지를 사유해야 한다고 영화는 말을 건다.
조재휘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