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영화학도들 사이에는 불문율이 있다. "영화제에서는 이미 개봉했거나 곧 개봉할 영화를 보지 말라." 영화제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작품들이 우선이라는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한국영화의 오늘- 파노라마' 섹션의 '밀정'(김지운, 2016)이나 '검은 사제들'(장재현, 2015) 등 집에서도 볼 수 있는 영화를 굳이 영화제에서 볼 필요는 없다. 적어도 영화 팬이라는 어느 군인이 지난 8월 개봉한 영화 '덕혜옹주'(허진호, 2016)를 보기 전까지는. 뿔테 안경에 머리가 짧았던 그는 자신이 놀림감인 줄도 모르는지 연신 싱글벙글이었다. 심지어 "군인인데 휴가 나와서 '덕혜옹주'를 보고 싶었다"며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그렇지, '덕혜옹주'는 IPTV 서비스로도 볼 수 있는 영화다.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 끝에 반전이 있었다. "GV(무대인사)인 줄 모르고 봤는데 손예진이 들어오더라고요." 그를 놀리던 시네필들이 1패를 기록하는 순간이다. 이쯤 되면 GV에 손예진이 나온다는 걸 몰랐다는 게 더 놀랍다. 그것도 군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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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된 배우 손예진. 김정록 기자 |
"가만히 앉아 있는데 손예진이 나를 보면서 걸어 들어왔다." 그는 자대에 복귀하면 후임들에게 그날의 영광을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분대원들은 사진을 보기 전까지 절대 믿지 않겠지만 영화제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손예진이 자신을 보며 들어왔다는 것만 빼면. GV(Guest Visit), 우리말로 '관객과의 대화'라 부르는 행사 덕분이다. 거장 감독은 물론 연예인들, 함께 작업한 스태프들을 자기 자리에 앉아 편안하게 만날 수 있다. 그러니 티켓 카탈로그에 'GV' 표시가 있는 상영작들 티켓은 하늘의 별 따기다. 뤽 베송이 영화 '더 레이디'(2011)로 영화의전당 하늘연극장에 왔을 땐 그 넓은 극장이 거의 꽉 찼다. 어쩌다 이병헌이나 김우빈 같은 한류스타가 오기라도 하면 차라리 티켓을 포기하는 편이 마음 편하다. 일본과 중국 팬들은 누구에게도 이병헌의 맞은편 앞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다.
겨우 표를 구했다 해도 난관이다. GV 시간은 길어야 30분인데, 질문거리가 생긴 관객들이 너무 많은 것이다. 모더레이터가 "예정된 시간이 다 됐다"고 말하면 원성이 여기저기서 쏟아진다. 작년 '다이빙 벨'(이상호, 안해룡. 2015)이 딱 그랬다. 안 그래도 시간이 부족한데 기자들의 질문을 받느라 정작 영화 팬들이 외면당했다. "이게 무슨 기자회견이냐"며 관객들이 이마를 구겼다. 이상호와 원해룡 두 감독이 안전하게 빠져나간 뒤 영화제 스태프와 자원봉사자들은 진땀을 흘리며 사태를 수습했다. 올해 다큐멘터리 '페이크'(모리 타츠야, 2016) GV는 그런 점에서 모범적이다. 외국인 감독에게 필요한 통역을 제공하느라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이 더욱 지체되는 상황. 그 순간 모더레이터는 "상영관 밖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마저 나누겠다"고 안내했다. 탁월한 임기응변이었다. 관객들은 아무 불평 없이 따라 나가 더욱 가까운 거리에서 감독과 질문을 주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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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큐멘터리 페이크(Fake)로 초청된 모리 타츠야 감독이 상영관 밖에서 관객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
그렇다고 모든 관객들이 GV를 좋아하는 건 아니다. '영화를 말로 직접 설명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일부 팬들은 영화가 난해하더라도 상상의 여지를 남겨두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한다. "GV를 듣고 나면 마치 문제를 풀기도 전에 답안을 먼저 본 것 같은 느낌이 든다"는 어느 시네필의 비유가 적절하다. 다른 이유도 있다. 배우 한예리는 지난 8일 영화의전당 중극장에서 진행된 '춘몽' GV 인삿말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제가 (GV로) 깬 것 같은 생각이 들어요." 맞는 말이다. 상영관에 불이 켜지고 스타가 들어오는 순간 모든 관심은 무대에 쏠린다. GV가 끝나면 영화 대신 연예인 이야기가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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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막작 '춘몽' GV. 왼쪽부터 장률 감독, 배우 한예리, 윤종빈, 박정범, 이주영. |
GV에 임하는 관객들의 자세도 참 다양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마자 앞줄 빈자리에 착석하는 부류가 첫 번째다. 이들은 애초 질문에 관심이 없다. 좋아하는 배우 얼굴을 좀 더 가까이에서 카메라로 찍으면 그만이다. 이들은 대체로 집에 돌아간 뒤 "카메라 액정만 쳐다보느라 실물을 못 봤다"고 후회한다. 두 번째는 굳이 단체복을 입고 소속을 드러내면서까지 영화 지식을 뽐내려는 관객들이다. 대체로 영화학도들이다. 롱 테이크의 의도부터 삼점 조명 방법, 촬영 기법까지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언뜻 유익한 듯 보이지만 '난 영화학도입니다'고 드러내려는 속셈이 보인다. 마지막은 스타의 등장에 그만 '심쿵'한 관객이다. 용기 있게 손을 들어 질문 기회를 잡았지만 대개 "너무 좋아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너무 떨리고요" "사랑해요" 등의 말을 반복하느라 질문 시간을 다 보낸다. 가끔 우는 관객도 있다. 이럴 땐 다른 관객들의 힘이 필요하다. 비웃지 말고 박수를 쳐주면 된다. '군인 시네필'은 과연 울었을까.
아쉽게도 올해는 영화제를 찾은 영화인들이 다른 해보다 적었다고 한다. 그나마 예정에 있던 GV도 취소된 것들이 제법 있다. 부디 갈등이 원만히 해결되기를 바란다. 군인의 휴가도 행복으로 채워주는, 낭만과 사랑이 넘치는 영화제를 위해서. 신동욱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