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음악으로 해방감 느끼며
- 춤추는 행위 그 자체가
- 자유로운 세상 밑거름 될 거라 믿어요"
오래된 우화 속 베짱이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 개미들의 걱정 어린 시선 속에서 신나게 노래했다. 저러다 추운 겨울이 오면 어쩌려고? 어쩌면 베짱이의 신나는 노래가 끝없이 반복되는 개미들의 노동에 적잖은 위안과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멈추지 않고 흥겨운 노래를 이어 하는 것 또한 소중하고 의미 있는 노동이지 않을까? 누군가는 신나게 노래해야 한다.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며 열심히 일만 하는 세상. 상상만 해도 지겹지 않은가.
최근 EP 앨범 'Rock And Roll Station'을 발표하고 매주 크고 작은 축제와 공연장에서 관객과 함께 흥청망청 춤추며 신나게 노래하는, 부산 지역에 서식하는 로큰롤 베짱이들, 3인조 로커빌리 밴드 '하퍼스'를 만나보았다. HOPPERS 라는 팀 명은 베짱이를 뜻하는 'Grasshopper'에서 따왔고, 'Hopper'는 '춤추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춤추기 딱 좋은 음악을 지향하는 팀 명에 잘 맞는다고 생각해 HOPPERS라는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이 연주하는 로커빌리(Rockabilly) 장르는 1950년대에 미국에서 가장 유행한 음악 장르로, 흑인의 리듬 앤드 블루스(R&B) 형식과 멜로디에 백인의 컨트리 리듬이 합쳐진 음악이고, 대표적인 뮤지션으로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버디 홀리(Buddy Holly) 등이 있다. 쉽고 신 나는 리듬, 귀에 쏙쏙 들어오는 멜로디로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다.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노래하고 연주하는 사람도 모두 함께 신나게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이라고 한다. 역시 하퍼스의 공연에선 무대와 객석이 따로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매번 신명 나는 춤판이 벌어진다. 음악에 취해 신나게 연주하는 밴드의 흥에 관객은 대책 없이 전염되는 듯하다. 과연 훌륭한 베짱이들이다. 어쩌면 누군가는 로큰롤이라면 음악 속에 저항의 메시지 같은 걸 듬뿍 끼얹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갑갑한 세상 속에서 우리 음악을 통해 남녀노소 구별 없이 해방감을 느끼며 함께 춤을 추는 행위 자체가 자유로운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고 그들은 얘기한다.
밴드 하퍼스는 기타와 보컬 및 작곡을 맡은 김경수, 콘트라베이스와 코러스 담당 현성용이 2013년 8월 친구들의 기획 공연 오프닝을 위해 꾸린 일회성 프로젝트를 계기로 결성됐다. 당시 드러머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동네 형이자, 8인조 스카밴드 스카웨이커스에서 드럼을 치는 이광혁이 하퍼스의 드러머를 자처하고 나섰다. 이광혁은 서서 드럼을 쳐야 한다는 요청을 받고 처음엔 좀 당황했다고 한다. 웬만한 성인 남성보다 커다란 덩치의 콘트라베이스(흥이 끝까지 차오를 땐 베이스 주자 현성용은 위태롭게 콘트라베이스를 밟고 일어서서 연주하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한다. 공연장 바닥이 고르지 않을 땐 가끔 넘어질 때도 있다고 한다)와 스탠딩 드럼, 기타로 이뤄진 독특한 악기 구성은 하퍼스의 트레이드 마크이기도 하다. 3인조의 단출한 구성이지만 사운드에 빈틈이 없고, 무대 위에서 멤버들이 모두 일어서서 흥겹게 연주하니 관객과 함께 소통하며 즐기기 좋다고 한다.
현재 하퍼스는 드러머 이광혁이 대표로 있는 부산의 인디레이블 루츠레코드 식구가 되어 부산 지역 아이돌이라 불리는 8인조 스카밴드 스카 웨이커스와 2인조 여성 록밴드 B9과 함께 크고 작은 기획 공연을 함께하고 있다. 루츠 레코드 소속 밴드 3팀은 공교롭게도 부산대 선후배 사이로 일부러 의도하진 않았지만 끈끈한 학연, 지연을 자랑하고 있다. 곧 the brocks라는 4인조 로큰롤 밴드도 루츠 식구로 합류할 계획이라 한다.
하퍼스의 첫 번째 EP 앨범은 오는 22일 디지털 음원을 등록할 예정이고, 그때까지도 기다리기 힘들다면 현재 소량으로 음반을 자체 제작해 한정 판매 중이라고 하니, 당장 공연장으로 달려간다면 멤버들이 직접 비닐을 까서 즉석에서 사인을 남겨주는 한정판 CD를 소장할 수 있을 것이다. 내년 초 정규 1집 앨범 발매를 목표로 공연활동 도중 틈틈이 자작곡을 만들고 있다.
현재 그들이 활동하는 부산의 로컬 인디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자, 활동하는 뮤지션들이 순수하고 열정적이라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공생할 수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서울보다 비즈니스를 잘못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그 역시 단점이라고 하기보다는 비즈니스 따윈 상관없이 내 갈 길 간다는 식의 저마다의 고집이 개성 있고 독특한 음악이 자연스럽게 공생하는 분위기로 이어지는 것 같아 재미있다고 한다. 매주 열심히 공연하고 있고, 내키면 언제든 자전거를 타고 광안리로 달려가 바다를 보며 싱싱한 활어 회를 먹을 수 있으니, 딱히 서울 진출에 대한 필요성은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음악으로 성공해서 돈을 벌기보다는 오래오래 밴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
부산은 바다를 끼고 있고 관광하기에 참 좋은 도시인데, 여름 휴가철 한때만 반짝 장사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이 아쉽다고 한다. 사시사철 부산을 찾도록 독보적인 문화 콘텐츠를 가져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부산 인디씬에 대하여 통제보다는 있는 모습 그대로 성장할 수 있도록 더욱 적극적인 정부 차원의 지원을 바란다고 주장했다. 아직은 다소 생소한 락커빌리 음악을 대중적으로 알리고,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음악팬이 우리 공연을 보러 부산을 찾아오는 것이 밴드 하퍼스의 최종 목표라고 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비행기 타고 멀리 하와이에 갔는데 찰랑거리는 우쿨렐레 선율 대신 어디에서나 질리도록 듣던 노래들만 반복된다면 얼마나 김새겠는가. 부산의 해변마다 부산스러운 노래들이 파도처럼 출렁이길 기대해본다. 겸손이 미덕이라지만, 우리 동네의 밴드들은 좀 더 뻔뻔하게 자랑해도 된다. 사실 그게 그럴 만하니까.
작가·다큐멘터리 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