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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춰버린 손·입 대신 눈으로 써내려간 '편지'

루게릭병 정태규 소설가, 투병 중에 새 창작집 펴내

  • 조봉권 기자
  •  |   입력 : 2015-01-14 20:34:40
  •  |   본지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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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게릭병으로 몸이 불편한 소설가 정태규 씨가 14일 부산 남구 대연동 자택에서 최근 펴낸 새 창작집 '편지'를 들어 보이며 밝게 웃고 있다. 전민철 기자 jmc@kookje.co.kr
- 단편소설 등 14편 수록
- 같은 병 남녀 다룬 작품도

루게릭병으로 투병 중인 소설가 정태규(57) 씨가 "몸은 많이 불편하지만, 글은 계속 쓰겠다"며 문우와 독자들에게 인터뷰 등을 통해 약속한 대로 새 창작집 '편지'(산지니)를 내놓았다.

"작품이 한 권 분량에 못 미쳐 두어 편 추가하려고 계획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못했다. 구상만 겨우 끝냈을 때 나는 이미 말하는 능력을 잃고 있었다. 구술할 형편도 못 되었다. 귀하신 안구 마우스는 자주 고장을 일으켜 미국 본사에 다녀오느라 적응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는 책에 쓴 '작가의 말'에서 마음먹은 대로 쓰지 못한 아쉬움부터 털어놓았다. 몸 전체가 천천히 마비되어 가는 병이고, 아직 치료법이 없어 모두가 무서운 병이라고 하는 루게릭병은 그의 작가정신 앞에서는 맥을 못 췄다.

아내 백경옥 씨는 "상태가 악화돼 요즘은 누워서 지내실 때가 많다. 이젠 구술도 힘들다. 다행히 미국에서 수리한 안구 마우스의 성능이 좋아져 카톡으로 소통한다"며 "집필 계획을 내게 얘기하고 문학계 새 작품과 경향에만 관심이 많다"고 전했다. 창작집 '편지'에는 스토리텔링 성격 단편소설과 콩트를 합쳐 14편을 실었다. 수록작 '비원(秘苑)'은 맑고 아름답다. 루게릭병 진단을 받은 남녀가 우연히 서울 창덕궁의 신비한 정원인 비원에서 만난 장면을 그려 작가 자신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갑자기 사람들이 해설사의 손짓을 따라 이쪽을 쳐다보았다.…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둘은 자리에서 일어나 개울 위의 작은 다리를 건넜다. "우리 병이 알려지면 사람들은 우리를 어떻게 볼까요?" 그녀가 소요암이라는 바위를 바라보며 심상하게 물었다. "…짧은 동정과 긴 망각… 자의든 타의든 우리는 잊혀질 것이오. 사람들은 우리와의 관계를 포기하겠지요." "몸으로부터도, 사람으로부터도 우린 끝없이 고립되어 갈 거예요." "동감이오." '('비원' 중)

차마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현실을 놓고 이어지는 남녀의 대화는 인상깊다. 둘은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가 인현왕후의 넋이 이끄는 대로 목욕을 한 뒤 고약한 부스럼을 치유했다는 비원의 연못에서 목욕한다. 남녀가 헤어지는 끝 장면은 이렇다. '돈화문 거리에서 둘은 악수를 하고 헤어졌다. "살아남아요."'

아내 백 씨는 "2012년 가을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서울의 병원에 다니던 지난해 여름 남편과 내가 비원에 가서 산책했는데 그때 구상한 소설"이라고 들려줬다. 다른 수록작은 대부분 써놓았던 작품이다. 임진왜란 때 동래성에서 싸운 젊은 조선 무사와 아내의 지극한 사랑을 그린 '편지'와 '3일간'은 생명에 대한 고결한 마음이 생생하다. '병삼이의 웃음' '우리 집 그 인간' 등 콩트는 낙천성과 웃음이 출몰한다.

정 작가는 "이 소설집으로 지금까지 써온 글의 한 단계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루게릭병이 나에게 계속적인 집필을 허락한다면 새로운 단계의 글쓰기에 도전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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