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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지구적 재난을 배경으로 만든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는 열차 안이라는 정해진 틀을 깨며 설국으로 변해버린 지구로 눈을 돌리는 발상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간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2013)는 미래에 닥친 전 지구적 재난을 배경으로 삼는다. 온난화를 해결하기 위해 대기에 냉각제를 살포한 결과 지구는 새로운 빙하기를 맞고, 살아남은 인류는 혹한을 피해 열차에 몸을 싣는다. 탑승한 승객들은 일등칸, 일반석, 무임승차한 꼬리칸의 난민들로 객차의 등급에 따라 계급이 나뉘어 각자의 위치에서 다른 삶을 영위한다. 17년 동안 노예처럼 억압과 굴종을 견뎌내던 꼬리칸 난민들은 마침내 혁명을 일으키고, 혁명의 리더 커티스는 열차의 지배자 윌포드를 찾아간다.
'설국열차'의 기본적인 플롯에 깊은 영향을 미친 건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전쟁 영화 '지옥의 묵시록'(1979)으로 보인다. 윌러드 대위가 커츠 대령을 암살하기 위해 수색하는 과정에서 베트남전의 참상을 목격하는 것처럼, '설국열차'에서 커티스는 윌포드를 찾아 꼬리칸에서 엔진으로 나아가면서 설국열차, 근대 문명의 종착역이자 축소판인 이 기계적 소우주의 실상을 서서히 목격한다.
■설국열차 '리바이어던'의 세계
엔진에 다다르는 데 성공한 커티스에게 윌포드가 후계자의 자리를 제안하며 말한다.
"저 다리 너머로 구역과 구역들이 언제나 있었고 또 그대로 있을 것이네. 이 모두가 무엇을 위해선가? 이 기차일세. 지금 이 순간 인구가 적당하고 모두 제 위치에 있지. 인류를 위해서야. 이 열차가 세계일세."
그의 말은 꼬리칸 난민들을 신발에 비유하며 분수를 알고 자리를 지키라던, 세세하게 구분된 각자의 위치에 머물러야 한다던 총리 메이슨의 연설과 일맥상통한다.
설국열차의 지배자들은 유기체의 각 기관이 고정된 위치와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사회의 구성원도 배정받은 역할과 신분에 따라 위치가 할당되어 있다고 여긴다. 정해진 배치에 따라 순응하면 질서가 조화롭게 유지되며, 만약 '신발을 머리에 쓰는' 것처럼 구성원의 위계를 바꾸거나 뒤흔든다면 사회의 균형과 안정이 무너진다고 주장한다. 이들의 언어는 명백하게, 사회를 유기체로 보는 보수주의자들의 관점, 즉 '사회 유기체론'(social organism)을 가리키고 있다.
"지도자 없이 인류가 어찌 되는지 잘 알지 않나. 서로를 삼켜대지.(…)이상하고 또 한심하지. 안 그런가? 자네가 저들을 저들 자신으로부터 구할 수 있네."
성난 군중이 몰려드는 걸 보면서 윌포드는 지배계급의 정당성을 역설한다. 이때 그의 논리는 정치학자 토머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떠올리게 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인간이 본질적으로 이기적 존재이며 자연 상태에서는 욕망과 자기 보호를 위해 폭력을 행사할 수밖에 없고, 결국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상태'에 빠지게 된다고 했다. 이를 막고 안정을 찾기 위해 국가라는 유기체적 질서, 즉 '괴물'(Leviathan)이 필요하며 사람들은 이에 복종하고 자신의 권리를 양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복종을 대가로 한 생존과 평화의 계약. 여기서 홉스의 '리바이어던'은 위계질서를 정당화하고 명령과 복종의 관계, 소수 특권층의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한 어용의 논리로 동원되고 만다. 혹한이 전 지구를 휩쓰는 종말의 세계, 열차 안에 머무는 것 이외에는 생존의 대안이 없는 '설국열차'의 세계에서 지배계급의 논리는 무척이나 '리바이어던'을 닮았다.
■'탈주'로서의 혁명
'설국열차'가 혁명을 그린 다른 영화들과 달리 보이는 건, 더욱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며 철학적 충격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꼬리칸의 정신적 지주였던 길리엄은 윌포드와 내통한 한 패였으며, 혁명 또한 시스템의 필요에 따라 미리 프로그램으로 준비된 필연에 지나지 않는다. 자유의지란 피지배자의 환상에 불과하며, 순진한 계몽과 해방의 서사는 완전히 부정당하고 만다.
불평등한 체제를 갈아엎어 버리겠다는 의지로 달려온 커티스였지만, '열차가 곧 인류이며 세계'라는 윌포드의 회유에 순간 설득되기도 한다. 그의 혁명적인 움직임 역시 열차에 의지해야 인류가 생존할 수 있다는, 이제까지의 체제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는 믿음 탓에 와해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티 오이디푸스'에서 이처럼 자본주의 질서의 벽에 갇혀 시스템 일부로 포섭되는 것을 '신경증'(neurosis)이라 불렀으며, 더 이상의 저항과 탈주를 포기한 채 허무주의에 사로잡히는 경우를 '정신병'(psychosis)이라 칭했다. 한때 민주주의와 혁명을 외치던 운동권 인사들은 어느 순간 체제에 포섭돼 또 다른 기득권층이 되었으며(신경증), 무수한 시민운동과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음에도 권력은 요지부동이고 사회는 개선되지 않는다. 혁명의 중심이어야 할 민중 역시 일말의 저항조차 포기한 채 현재의 질서에 안주(정신병)하기 십상이다. 위정자의 이름만 바뀔 뿐, 그 무엇도 개선되지 않는다. 이런 딜레마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없을까.
뜻밖에 출구로 빠져나오는 새로운 접점은 혁명아 커티스가 아니라 보안설계자 남궁민수에게서 발견된다.
"이 바깥으로 나가는 문들 말이야. 워낙 18년째 꽁꽁 얼어있다 보니 이게 무슨 벽처럼 생각하게 됐는데, 사실은 그냥 문일 뿐이란 말이지."
남궁민수가 엔진으로 통하는 문이 아닌, 바깥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자 했던 것을 두고 들뢰즈와 가타리라면 '홈 패인 공간'을 벗어나 '매끄러운 평면(천개의 고원)'으로 나아가는 탈주의 몸짓이라 높이 평가했을 것이다.
열차 안에 속박된 이들은 열차라는 틀 안에서, 체제와 가치관 안에서 '인류'(humanity)를 정의하지만 그것은 기껏해야 정해진 틀 안에서의 순환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악순환에서 벗어나는 길은 열차로 표상되는 기존의 체제, 틀 자체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것이며 바깥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 열차로 표상된 질서가 완전히 파괴된 빈자리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의 미래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제까지 있었던 것과 전혀 다른, 불확실한 만큼 무한한 가능성과 끝없는 선택의 신세기가 펼쳐질 것이다.
# 만화 '설국열차'
영화 '설국열차'의 원작은 1970년대 자크 로브, 알렉시스, 장 마르크 로셰트가 지은 프랑스 만화 '설국열차'다. '탈주자' '선발대' '횡단' 등 3권 분량으로 구성된 이 만화는 새로운 빙하기를 피해 열차 안에서 생존하게 된 인류의 이야기라는 모티브와 세계관만 같을 뿐 영화 버전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주인공 일행이 열차를 가로질러 엔진으로 향한다는 점에서 영화 '설국열차'의 기본적인 이야기는 1권 '탈주자'에 바탕을 두고 있다. 봉준호 감독은 2005년께 '괴물' 촬영에 들어가기 전 서울 홍대 근처의 만화가게에서 이 만화를 접하고 영화화를 결심했다고 한다.
조재휘·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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