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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찰리 채플린은 '모던 타임즈'에서 작은 방랑자를 내세워 근대 기술문명 사회에서 정상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힘겨운지 이야기한다. 작은 방랑자는 소외된 인간의 절망과 고통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MK2 제공 |
찰리 채플린(1889~1977)이 연기한 작은 방랑자(the tramp)는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캐릭터 중 하나이다. 무성영화의 전성기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채플린의 코미디는 여전히 보는 이를 울리고 웃긴다. 심지어 그의 영화를 전혀 보지 않은 이들도 우스꽝스러운 콧수염에 낡아 해진 중절모를 쓰고 지팡이를 돌리며 절룩거리는 걸음으로 거리를 방황하던 초라한 신사를 기억한다. 작은 방랑자는 빈민가에 사는 가난한 이들과 어울리며 희망과 위안을 주지만, 매번 오해를 받아 경찰에 쫓기거나 이웃의 박대에 시달린다.
채플린의 작은 방랑자는 순진무구한 마음씨를 가진 따뜻한 이웃이었다. 아울러 20세기 세속 도시에서 팍팍한 삶을 견뎌내지 못한 부적응자였으며, 여유와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는 19세기 낭만주의 음유시인이었다. '키드'(1921)에서 '시티 라이트'(1931)에 이르기까지 채플린이 빚어낸 무성영화 코미디 명작이 한결같이 '한 아름의 웃음, 어쩌면 한 방울의 눈물이 함께 하는 영화'(a picture with a smile. and perhaps, a tear)일 수 있었던 건 바로 이와 같은 인물과 시대 사이에 놓인 괴리에서 기인한다.
몰인정한 시대에 떨어진 천사 이야기. 채플린의 시대착오적 방랑자는 시대의 버림받은 자들 편에 서서 문명의 어두운 그림자를 고발하곤 했다.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첨단 과학과 경제 호황의 시대 안에서 절망과 고통, 인간소외를 보았던 채플린은 마침내 '모던 타임즈'(1936)에서 20세기에 관한 자신의 비판적 철학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진보를 추구할수록 퇴보하고, 부유함을 추구할수록 빈곤해지는 역설의 근대에 관해.
■생체권력-'신체를 기화하라!'
'모던 타임즈'는 근대 기술문명의 속성을 인상적인 시각적 상징을 통해 함축한다. 초침이 돌아가는 시계를 클로즈업한 영화는 이윽고 축사에서 몰려나오는 양 떼와 지하철을 이용해 공장으로 출근하는 노동자들을 교차 편집해서 보여준다. 시계로 표상되는 기계의 리듬에 맞춰 축사에 갇힌 가축처럼 인간을 관리하려는 시스템의 욕망. 자본은 분업과 표준화를 통해 시간당 생산 효율을 증대하려 하며, 기계적인 반복을 통해 노동자들의 동작을 관리한다.
채플린이 연기하는 작은 방랑자를 포함해 영화 속 노동자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 쉴새 없이 밀려 들어오는 기계의 너트를 조인다. 같은 동작을 반복하며, 사장의 명령에 따라 기계의 작업 속도가 조절되면 이들의 움직임 역시 그에 맞춰진다. 마치 생산시설의 일부분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심지어 채플린의 방랑자는 동료와 다투면서도 컨베이어 벨트의 속도에 뒤처지지 않게 하려고 안간힘을 쓰며, 작업을 멈춘 점심시간에도 너트 조이는 동작을 강박적으로 반복한다. 격무와 스트레스로 지쳐버린 그는 결국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된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이나 '성의 역사'에서 인간의 신체를 권력이나 자본의 의지와 필요에 따라 길들이고 규칙화하는 것을 '생체권력'(bio-pouvoir)이라 말했다. 자동차왕 헨리 포드나 테일러가 바랐던 것처럼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 신체의 개체적 독립성을 파괴하고 자본가의 필요에 철저히 복무하는 기능적인 도구가 되도록, 모든 에너지와 관심이 정해진 작업에만 집중되도록, 기계에 전유되도록 노동자의 팔과 다리를 훈련한다. 이때 신체에 대한 지배는 명령하는 차원을 넘어 개인의 자발적인 복종, 무의식적인 규칙 준수를 이끌어내는 지경에 이른다.
기계의 일부분이 된 인간. 이 표현은 더는 풍자나 은유가 아니다. 기계 안으로 딸려 들어가서도 나사를 죄는 직분에 충실해지려 하며, 자동 급식 기계에 매여 식사의 자율성을 상실한 방랑자의 모습은 기계의 주인이 아니라 부속품으로, 시스템의 주체가 아니라 도구로 전락한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이다.
■분열자, 탈주하다
'모던 타임즈'에서 채플린의 작은 방랑자는 담배 한 대 피울 틈을 주지 않는 사장의 감시(이 장면은 푸코가 말하는 원형감옥 판옵티콘과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에 나오는 빅 브라더를 떠올리게 한다)하에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가며 출근할 때마다 시간 체크기에 꼬박꼬박 카드를 갱신한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지속적인 관리와 감시 아래 놓여 있으며, 공장이 아닌 곳에서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신경쇠약 증세로 해고당한 이후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우연히 데모대 행렬에 휘말려 주동자로 오인되어 감옥 신세를 지게 된다.
근대 사회의 시스템은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통제에 복종하도록, 정해진 시간을 준수하고 공간의 규칙을 지키는 양순한 시민이 되도록 길들인다. 만들어지는 건 단순한 '제품'만이 아니다. '인간'이 만들어진다. 생체권력은 일상의 공간에조차 뻗쳐 있다. 학교에서 직장까지 우리는 성실한 시민, 근면한 노동자가 되도록 교육받으며, 일탈하지 않도록, 질서를 벗어나지 않도록 길들지 않았던가?
'모던 타임즈'는 방랑자로 살아가는 채플린이 어떻게 주변으로부터 소외되고 억압받는지 계속 보여준다. 영화에서 채플린의 캐릭터는 항상 감시와 관리의 대상이다. 그는 노동하고 가정을 꾸리며 내 집을 마련하는데 부심하는 등 노동과 생산과 소비의 순환을 그리는 자본주의적 삶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탈코드화(decoding)한 일탈자, 분열자(schizoid)를 방치할 수 없기에 자본주의 시스템은 그를 다시 붙잡아 노동과 생산과 소비의 사이클 속으로 돌아가도록 재사회화하려 한다. 그런 점에서 '모던 타임즈'가 공장에 이어 정신병원과 감옥의 공간학적 지형도를 그리는 것은 사뭇 의미심장하다.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화'하려는, 정상적인 시민, 근면한 노동자를 재생산해내고 개인의 신체를 지배하기 쉬운 몸으로 바꿔내려는 자본의 욕망이 여실히 드러난다. 하지만 채플린의 방랑자는 순응하기를 거부하고 길을 떠난다. 톱니바퀴 부품이 되지 않기 위해, 온전히 사람으로 살기 위해.
채플린은 근대라는 시대 속에서 정상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지난하고 비인간적인지를 방랑자의 행동을 통해 이야기한다.
'모던 타임즈'는 경고의 영화이다. 드링크제와 카페인을 마셔가면서까지 열심히 일해도 더욱 빈곤해지고, 부자유의 조건에 속박된 우리의 아이러니한 처지를 돌아보게 한다.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다. 그리고 곳곳에서 사슬에 묶여 있다'(L'homme est ne libre, etpartoutil est dans les fers). 장 자크 루소의 말이다.
# 판옵티콘(panopticon)
판옵티콘(사진)은 그리스어로 '모두'(pan)를 '본다'(opticon)란 의미를 지닌 합성어다.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가상의 원형감옥으로 중앙에 세워진 높은 탑에서 감시자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모든 수용자를 감시할 수 있다.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벤담의 판옵티콘을 잔인한 형벌 대신 감시와 규율로 사람들을 통제하는 근대 국가의 권력에 빗댔다.
사무실의 모니터로 공장 전체를 감시하는 자본가의 모습을 통해 '모던 타임즈'는 푸코가 '감시와 처벌'을 쓰기 무려 30년 전에 판옵티콘을 시각화한 선구적인 영화가 되었다.
조재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