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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7 시리즈는 전통적인 공식을 이어가면서 예상치 못한 반전과 인물을 등장시켜 새로운 재미를 선사한 덕분에 50년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았다. '007 골드핑거'의 한 장면.
골드윈 메이어 컬럼비아 픽쳐스(소니 픽쳐스) 제공 |
'007 살인번호'(1962)가 만들어진 이래 '007 스카이폴'(2012)에 이르기까지 007 시리즈는 무려 50년 동안 관객의 사랑을 받아왔다. 제임스 본드는 영화를 통해 국적과 시대를 넘어선 문화적 아이콘이 되었으며, 뒤를 따라 등장한 첩보 액션 영화들은 모두 007 시리즈의 영향 아래 놓여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냉전이 종식되고 시대는 달라졌지만 007 시리즈의 인기는 현재진행형이다. 미국과 소련의 대립이라는 정치적 맥락에서 007 시리즈의 흥행 요인을 찾았던 컨텍스트 비평에 상당한 수정이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가이 해밀턴의 '007 골드핑거'(1964)는 23편에 달하는 007 시리즈 중에서도 손꼽히는 기념비적 걸작으로 평가된다. 인물의 특징, 서사의 구조 등 여러 가지 측면에서 보면, 현재까지 이어지는 007 영화들은 '007 골드핑거'에 달린 주석이나 변주일 것이다. 원형의 서사. 이 한 편을 통해 우리는 007 시리즈가 무수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동안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은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합법적인 기업인을 가장한 범죄 세계의 큰 손 오릭 골드핑거는 교묘한 수법으로 금을 해외로 밀반출하고, 영국 정보국에서는 이를 조사하기 위해 제임스 본드를 투입한다. 본드는 수사 도중 골드핑거가 '그랜드 슬램 작전'이라 명명한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음을 알아낸다. 골드핑거가 미국 정부의 금괴 저장소 포트녹스에 침투한 다음 원자탄을 터뜨릴 계획으로, 방사능 반감기인 58년 동안 서방 세계의 금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자신이 보유한 금의 가치를 천정부지로 올린다는 경제 교란 작전이었다. 거듭되는 위기 상황을 헤치고 본드는 마침내 골드핑거의 계획을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차이와 반복
움베르토 에코는 007 시리즈를 학문적으로 접근해 장르 문학에 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바 있다. 에코의 문화비평서 '대중의 영웅'에 따르면 007 소설과 영화의 서사 구조는 다음의 9단계로 정리될 수 있다.
①M이 제임스 본드에게 임무를 지시한다. ②악당이나 그의 부하가 본드와 만난다. ③본드는 악당의 정체와 뒷배경을 조사한다. 마찬가지로 악당 역시 본드에 관한 정보를 탐색한다. ④본드걸이 등장한다. ⑤본드가 본드걸과 사랑에 빠진다. ⑥악당이 본드를 붙잡는다.(상황에 따라 본드걸이 같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⑦악당이 본드를 심문하거나 고문한다. ⑧본드가 악당을 처치한다. ⑨본드가 본드걸과 다시 조우한다.
007 시리즈에는 추리소설이나 무협영화처럼 관습으로 정착된 공식이 있다. 단순하게 공식만 답습한다면 독자나 관객은 싫증을 내고 흥미를 잃게 될 것이다. 반면 작품을 참신하게 만들기 위해 서사 구조를 예상 불가능하게 비틀어버린다면 익숙한 재미를 바라는 독자의 관성을 위협할 가능성이 있다. 동일한 서사를 반복하면서도 차이를 감지할 수 있도록, 이야기의 공식을 유지하되 예측이 어렵도록 능숙하게 변주한다면 관객은 주인공이 이길 것임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더라도 정신없이 빠져 들게 된다.
이처럼 007 영화의 서사가 주는 쾌감을 움베르토 에코는 체스나 축구 경기와 흡사하다고 지적한다. 체스판의 룰과 장기말의 특징, 시합에 참여하는 선수와 규칙을 미리 알고 있지만 완급을 달리하며 공격과 수비가 이어지는 걸 흥미롭게 보는 것처럼, 007 시리즈 역시 결말을 뻔히 알고 있는 게임임에도 그 안에서의 다양한 변주가 주는 재미에 흠뻑 젖어 보게 된다.
'007 골드핑거'는 이러한 '차이와 반복' 전략을 가장 명료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우리는 이미 제임스 본드가 본드걸을 만나고 악당에 맞서 승리할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본드걸인 줄 알았던 여성 캐릭터 둘이 영화 중반에 죽고 진짜 본드걸 푸시 갈로어가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가 하면, '007 살인번호'와 '007 위기일발'(1963)에서 항상 무적이었던 본드가 만만찮은 적수를 만나 죽음의 위기에 몰리게 되는 걸 보면서 긴장할 수밖에 없게 된다.
■대위법의 미학
007은 현대판 기사(騎士) 이야기이다. 중세 기사도 문학의 기사처럼 본드는 M(아서왕)으로부터 임무를 부여받고 Q(멀린)로부터 신무기(마법)를 받아 악당(괴물 용)을 물리치러 떠난다. 악을 물리침으로서 선을 회복한다는 기사도 문학의 설화 구도는 007에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으며, 선악의 극명한 대비와 마찬가지로 본드의 적들 역시 본드와는 상반된 극점을 이루는 존재로 묘사된다. '007 골드핑거'는 그런 면에서 나중에 만들어진 007 영화의 기형적 악당들에게 모티브를 제공한 영화다.
악당들은 본드와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나타나 대립쌍을 이룬다. 본드가 건장한 체격에 매너있는 영국 신사의 이미지로 등장한다면 골드핑거는 나치를 연상케 하는 독일계에 엄청난 뚱보로 묘사되고, 그의 부하 오드잡은 아시아계로 설정되면서 서로를 반대극점에 처하게 만든다. 영국 정보부 요원으로서 본드가 자유 진영을 위해 싸우는 투사라면 골드핑거와 그의 하수인은 중국 공산당의 후원(플레밍의 원작 소설에서는 소련)을 받아 서구 세계의 경제를 교란시키려 한다.
본드의 상대역에 걸맞게 악당들 역시 만만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는데 '007 골드핑거'에서 골드핑거와 오드잡은 만능형 영웅인 본드가 지닌 속성을 둘로 나눠 일그러뜨린 거울 이미지로 제시된다. 골프장에서 잠시 농락당하기는 했지만 골드핑거는 기상천외한 작전 능력과 지성으로 본드의 두뇌를 능가하며, 오드잡은 골프공을 맨손으로 으깨는 괴력으로 본드의 육체적 능력을 압도한다. 007 영화의 강렬함은 이처럼 전혀 다른, 서로 상반되는 양대 극점을 충돌시키면서 선과 악의 이분법을 시각화하는 대위법에서 나온다.
동화에서처럼 플레밍과 007 영화의 감독들은 선과 악, 빛과 어둠을 단순하게 나누어 갈등구조를 만들어내는 식의 서사 전략을 취한다. 그래서 어린 시절 전설과 설화 속의 영웅을 동경했던 어린이들은 자라서 어른이 된 뒤에는 제임스 본드에게서 잃어버린 유년기의 동경을 되찾는다. 인종차별에 이념 편향, 노골적인 상업성으로 무수한 비판을 받았지만 그럼에도 007 시리즈가 50년을 이어오며 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건 바로 이처럼 효율적인 대중오락의 메커니즘, 원형의 서사를 취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전설의 본드카 '애스턴 마틴 DB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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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07 스카이폴'에 등장한
애스턴 마틴 DB5. |
애스턴 마틴 DB5는 '007 골드핑거' '007 썬더볼'(1965)에 등장해 선풍적인 인기를 끈 대표적인 본드카이며, 007 시리즈의 트레이드마크 중 하나가 되었다. '007 골드핑거'가 세계적으로 흥행에 성공하자 애스턴 마틴 DB5의 판매량은 무려 60%나 늘었다. 007 시리즈 50주년 기념작이었던 '007 스카이폴'(2012)에서 본드가 갈아타는 차 역시 애스턴 마틴 DB5이며, 번호판 역시 '007 골드핑거'의 BMT216A를 그대로 따랐다.
조재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