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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노아'는 타락한 인간의 정죄와 선량한 노아가 만든 방주를 통해 이기적인 인간의 한계를 그리고 있다. 이 영화는 근대 문명이 다다를 종착지를 예언하는 듯하다. 파라마운트 제공 |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노아'(2014)는 '노아의 방주'로 유명한 기독교 신화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영화이다. 신이 타락한 인간 세계를 정죄하기 위해 큰 홍수를 일으키지만, 자신의 창조물들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선량한 인간 노아로 하여금 거대한 방주를 만들게 한다. 신화학자들은 이 유태-기독교의 전승을 실재 사건이라기보다 길가메시 서사시를 비롯해 고대 사회에 널리 퍼져있던 다양한 홍수 전설에서 모티브를 얻어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편에 기술된 이 짤막한 이야기에 감독은 여러 가지 설정과 각색, 상징적인 영상을 덧붙인다. 신의 뜻을 거스르고 아벨을 죽인 카인의 후손들이 도시 문명을 건설, 확장하며 자연을 파괴하는 한편, 카인과 아벨의 다른 동생 셋의 후손인 노아는 신의 창조물들을 지키며 환경에 순응해 살아간다. 노아가 신이 내린 계시에 따라 타락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방주를 만드는 과정에서 자원 고갈로 새로운 터전을 찾던 카인의 후손들이 노아의 영역을 침범하면서 양쪽의 충돌이 빚어진다.
■근대 문명의 욕망에 관하여
'노아'는 기독교 전설 영화나 시대극이라기보다 종말론적 SF, 포스트 아포칼립스(Post-Apocalypse) 영화에 가깝다. 전통적인 시대극과는 전혀 다른 시각적 디자인과 미장센을 통해 시대 불명, 국적 불명의 세계를 그리면서 영화의 배경이 어쩌면 태초가 아니라 문명이 절멸한 이후일지도 모른다는 분위기를 은연중에 풍긴다. 영화는 노아가 여행 중에 지나치는 폐허, 더는 소모할 자원과 노동력이 없어 버려진 장소들을 비추며 근대 문명이 다다를 종착지를 예언하는 듯하다.
카인의 후예들을 이끄는 리더로 두발카인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창세기' 원전에는 나타나지 않는 이 인물은 타락한 인간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캐릭터로 노아와 대립각을 세운다. 그의 입장에 따르면 인간이 살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폭력과 살상도 정당화될 수 있다. 두발카인과 그의 백성들은 신이 창조한 천지만물은 인간을 위한 자원으로 소모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태도는 자연을 정복하고 이용할 대상으로서만 바라본, 모든 것을 인간중심적인 관점에서 가치를 두었던 근대 서구의 자연관과 일치한다. 근대 기술의 본질에 관해 하이데거는 '내놓도록 닦달하는 것'(her-aus-forden)이라 지적한 바 있고, 프란시스 베이컨 역시 '자연이란 여신을 무릎 꿇리고 복종케 하여 남김없이 그녀의 비밀을 털어놓게 해야 한다'고 했다. 석탄을 가공해 코크스를 뽑아내고, 광석을 정제해 금속을 만들고, 황폐한 농지에 비료를 쏟아 부어 남아있는 지력마저 고갈시키는 것처럼 우리는 자연을 닦달하고 착취할 대상으로 바라보는 데에 익숙해져 있다.
대상을 부품으로만 취급하는 타자화의 폭력은 비단 자연만이 아니라 인간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두발카인은 고갈된 광석을 차지하기 위해 노아의 아버지 라멕를 살해해 땅을 빼앗았고, 두 아들의 며느릿감을 찾기 위해 두발카인의 마을에 잠입한 노아는 그곳에서 사람을 팔아 그 값으로 먹을 것을 사는 아비규환을 목격한다.
■'홀로-살기' 아닌 '서로-살기'로
'더 레슬러'(2008)와 '블랙 스완'(2010)을 통해 인간의 육체성을 탐구해온 아로노프스키의 철학적 비전은 '노아'에 이르러 인간 존재의 육체성에서 원죄(原罪)의 근원을 찾기에 이른다.
육체를 가진 존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고 연장하기 위해 행동하기 마련이다. 신화 속의 영적 존재가 아닌 이상, 물리적 육체를 지고 산다는 것은 육체를 유지하기 데 필요한 것들을 욕망해야 함을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이러한 생명의지를 두고 코나투스(conatus)라고 부른다. '잘살아보자'는 명제에는 어떠한 이견도 없는 것처럼 모든 생명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며 신은 이러한 개별 존재들의 욕망에 반대하지 않는다.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창세기 9장 7절)는 성서의 구절처럼, 오히려 신은 잘살아보려는 인간의 노력과 휴머니즘적 기획을 긍정할 것이다. 문제는 살기 위해 저지르는 인간의 행동들 즉, 살육과 파괴다. 인간은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 자원을 채취하고 동물을 도살하며 농지를 혹사시키지만, 이 모든 것이 고갈되는 만큼이나 인간이 죽음에 가까워지기도 한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신이 두발카인을 버리고 노아를 선택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영화의 도입부에서 노아는 사냥감으로 쫓기던 짐승을 구해주고, 약초를 캐더라도 필요한 것 이상은 캐지 않도록 자식들을 교육한다. 방주를 만들고서도 어떻게 서로 다른 종의 동물들이 별 탈없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고민하고 방법을 찾는다. 노아에겐 '대상과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어울릴 것인가'라는 윤리적 고민, 상생과 공존에 관한 고려가 있다. 심지어 그는 신의 창조물을 구하기 위해 인간인 자신과 가족들 역시 없어져야 한다는 극단적인 회의감에 빠진다.
'노아'에서 신은 자신의 형상을 드러내지 않지만 대신 노아를 선택해 지구의 생명체들을 구하고 타락한 인간에게 물의 징벌을 보내는 것으로 자신의 의지를 분명하게 '표현'한다. 신은 인간의 생명의지를 존중하는 동시에 다른 생명 역시 인간 못지않게 생육하고 번성해야 함을 알린다. 또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다른 존재와의 상호 교환적 관계가 파괴된다면 우리의 실존 역시 파괴될 것임을 경고한다.
인간이 더 나은 삶을 누리려 노력하는 것 자체는 악하지 않다. 하지만 순전히 이기적인 욕망 때문에 억압과 위계를 만든다면 그로부터 죄와 타락은 시작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인간과 우주의 나머지와의 새로운 관계'(클리버)를 사유하는 일이다. 만약에 신이 있다면 우리에게 이를 바라지 않겠는가?
# 기독교 영화의 르네상스
1950년대와 1960년대는 기독교를 소재로 한 스펙터클한 영화의 전성기였다. 극단적인 반공주의 매카시즘 광풍이 몰아치던 이 무렵 미국 사회는 도덕적 엄숙주의에 젖어들었으며, 문화계 전반에 사상 검증과 탄압, 검열이 엄격해졌다. 이 시기에 검열의 손길을 피하면서 대중적인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소재로 기독교 영화가 환영받았다. 머빈 르로이의 '쿼바디스'(1951), 세실 B. 드밀의 '십계'(1956), 윌리엄 와일러의 '벤허'(1959), 니콜라스 레이의 '왕중왕'(1961) 등은 이런 배경에서 나온 영화다. 최근 기독교 영화의 유행이 새롭게 부활하고 있는데 '노아'와 함께 '선 오브 갓'(2014) 등이 나왔고, 연말에는 '엑소더스-신들과 왕들'(2014)이 공개될 예정이다.
조재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