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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 성폭행 사건이란 추악한 현실을 소재로 한 이창동 감독의 '시'는 문학으로 현실의 참담함을 받아들이고 속죄를 하려는 미자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무책임함에 경종을 울린다. NEW 제공 |
- 윤리가 바닥을 드러낸 현실서
- 참된 시 쓰기가 보여준 의미는
- 타인의 고통을 가슴으로 체화
- 참담함 드러내고 사죄하는 것
이창동의 '시'(2010)는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바탕으로 한다. 강물에 한 여중생 시체가 떠내려오는 장면으로 시작된 영화는 이 소녀의 이름이 박희진이고 그녀가 6개월간 같은 학교 남학생 여섯 명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다 견디지 못하고 강에 몸을 던졌음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한 여중생의 죽음 이후 남은 자들. 가해자와 가해자 부모들은 책임을 회피할 궁리에 여념이 없고, 피해 학생 희진의 어머니에게 위자료 3000만 원을 주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시키려 한다.
영화는 가해 학생 여섯 명 중 한 명인 종욱의 할머니(양미자) 입장에서 한국 사회 윤리의 바닥을 보여준다. 파출부 생활을 하며 손자를 키우는 미자는 연립주택에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화려한 꽃 모자로 치장하는 멋쟁이 할머니다. 우연히 동네 문화원에서 문학 강좌를 수강한 그녀는 시를 쓰는 일에 몰두하고,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세상의 아름다움을 찾으려 한다. 그런 그녀에게 손자가 성폭행 사건에 연루된 사실이 전해진다. 전혀 아름답지 않은 세상, 가난과 폭력과 몰인정한 현실을 마주하고서 그녀는 기어이 시(詩)를 쓸 수 있을 것인가?
■가해자의 논리-무책임의 체계
'시'의 각본은 '밀양 여중생 성폭행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영화는 성폭행 사건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추악한 풍경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경찰은 피해자의 고소가 없다는 이유로 조사에 손을 대지 않으며, 학교는 피해자 부모를 윽박질러 합의를 강요하고, 가해자 부모들 역시 이에 편승해 적당한 선에서 사건을 묻어버리려 한다. 심지어 대책회의를 위해 모인 가해자 부모 중 일부는 '피해 학생도 좋아서 했다는데…'라는 말을 내뱉는다. 성범죄에 관해 어떠한 사회적, 도의적 책임도 지지 않으려는 모종의 공모가 당연하다는 듯이 벌어졌다.
일본의 정치학자 마루야마 마사오는 '일본의 사상'에서 이런 유의 도덕적 해이를 두고 '무책임의 체계'라고 지적한다. 일본은 전쟁을 일으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았고 자국 역시 엄청난 경제적 피해와 인명 손실을 보았지만, 군부세력 일부를 제외하고는 전범으로 처형되어 마땅한 이들 다수가 처벌받지 않았다. 이처럼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상황은 '누구도 책임을 지고 반성하거나 피해자에게 사죄하지 않아도 된다'는 그릇된 의식을 사회 구성원에게 불어넣는다. 도리어 가해자의 논리로 피해자를 윽박지를 수 있는 적반하장은 이와 같은 사회 현실의 토대에서 자라고 번성한다.
이런 지적이 비단 일본 만의 것인가? 반민족 범죄와 군사 독재에 영합한 이들은 사회지도층 행세를 하며, 성범죄 피해자에게 도리어 책임을 전가하는 적반하장에, 세월호 참사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암울한 현실에서 '무책임의 체계'는 이미 일상이 되어있지 않은가? '시' '도가니'(2011) '한공주'(2013) 등 영화에서 목격하는 한국 사회의 무책임, 도덕적 해이는 비틀린 근현대사가 배태한 구조적 재앙이다. 이창동 감독은 이를 '박하사탕'을 통해 보여준 바 있고, 그 연장선에서 '밀양'과 '시'를 이어가고 있다.
■하나되기(at-one-ment)-속죄를 향해
12세기 프랑스 신학자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는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을 두고 색다른 견해를 밝혔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는 메마를 대로 메말라버린 인간의 마음 한가운데에 삶의 고통에 관한 연민의 감정을 샘솟게 하려고, 이 세상 물질에 눈멀어버린 인간의 머리와 가슴을 깨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길 자처했다는 것이다. 요컨대 십자가 책형은 남의 고통에 절실히 공감하고 모두가 '하나 되도록'(at-one-ment)하는, 분열된 삶을 하나로 묶는 '화해'이자 '속죄'(atonement)의 행위였다.
아벨라르는 신앙하는 이들이 그리스도에게 향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이란 바로 '연민'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희생과 죽음을 되새기면서 우리는 비인간적인 삶을 살도록 강요하는 조건을 되돌아보며, 내면에 잠든 휴머니즘을 회복할 필요를 일깨운다.
'시'의 주인공 미자는 희진이 다닌 학교 운동장과 성폭행 현장이었던 과학실습실, 집을 차례로 방문한다. 희생자의 처지를 이해하기 위한 이 추모의 순례를 통해 미자는 희진이 살아온 삶과 피해자로서 그녀가 감당했어야 할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 가해자 부모들 간의 대책회의에 참석해 창밖의 맨드라미를 바라보며 현실에서 눈 돌렸던 그녀는 차츰 시를 쓰면서 '시상은 찾아오는 게 아니라 필사적으로 찾는 것이다. 그러나 멀리가 아닌 내 주변, 내가 있는 자리에서 얻는 것'이라는 시인의 조언을 몸소 실천하며 자신의 손자가 저지른 일로부터, 비극의 현실로부터 눈 돌리는 일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간다.
■미자의 선택이 전해주는 것
마침내 미자의 선택은 희진의 처지에 자신을 대입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파출부로 일하던 집의 강 노인과 원하지 않는 섹스를 함으로써 성폭행당했던 희진의 상황을 가슴으로, 온몸으로 체화한다. 여기서 미자의 행위는 접신(接神)한 무당이 억울하게 죽은 원혼의 행동을 대신 해주며 그 혼을 달래는 해원(解寃)의 행위처럼 보인다. '시'가 보여주는 미자의 모습은 아벨라르가 말하는 '속죄', 타인의 고통에 연민을 가지고 몸소 함께 나누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됨'일 것이다. 합의가 임박한 시점에 미자는 경찰에 손자를 고발하고 직접 지은 시 한 수를 남긴 채 사라진다. 희진이 그랬던 것처럼 미자의 시신도 강물에 떠내려오리라는 암시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감돈다.
아도르노는 '홀로코스트 이후에 시를 쓰는 건 야만'이라고 말했다. 이 일갈에는 낭만과 서정의 언어로 현실을 포장하고 외면하는 짓거리를 두고 볼 수 없었던 지식인의 분노가 서려 있다. 그러나 '시'에서 이창동 감독은 아도르노의 일갈에 화답하듯 시 쓰기를 통해 세상을 직시하고 현실의 참담함을 받아들이는 한 영혼을 보여준다. 타인의 고통으로부터 눈 돌리지 않고, 세상의 저주받은 자들과 함께하려는 의지를 가지는 일. 세계의 비극성에 눈뜨는 데서부터 참된 문학의 길이 열린다고 '시'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 밀양 성폭행 사건
2004년 1월 고교생 41명이 모 여중생 5명을 유인해 집단 성폭행하고 금품을 갈취한 사건이 벌어졌다. 2004년 12월이 되어서야 가해자 17명이 특수 강간 혐의로 구속되고, 나머지 24명은 불구속입건 됐다. 하지만 검찰이 가해자 41명 중 구속영장을 신청한 이는 3명에 불과했고, 12명은 보강조사, 6명은 불구속 입건, 나머지 20명은 훈방됐다. 사건 이후 피해 학생 일부는 오히려 가해자 가족으로부터 협박에 시달렸다. '시'와 '한공주'는 바로 이 사건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조재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