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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찬욱 감독의 '박쥐'는 흡혈귀를 등장시켜 전통과 전근대적인 것을 무너뜨리고 자본주의가 판치는 한국사회를 풍자한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
박찬욱의 '박쥐'(2009)는 한국 영화로는 드물게 흡혈귀 영화를 표방한 작품이다. F.W 무르나우의 '노스페라투'(1922)가 흡혈귀 영화 역사를 시작한 이래 고전적인 흡혈귀 영화들은 똑같은 이야기를 변주해왔다. 드라큘라처럼 흡혈귀가 등장하면서 마을이 공포에 휩싸이고, 피를 빨린 사람들은 흡혈귀의 하수인으로 전락한다. 성직자나 과학자를 중심으로 뭉친 사람들은 결국 흡혈귀를 물리칠 방법을 찾아낸다. 하지만 '박쥐'는 이런 전형적인 이야기 흐름을 따르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은 흡혈귀라는 소재만을 가져올 뿐 전혀 다른 인물과 이야기를 그린다. 이 영화는 일종의 종교극이다. 병자를 구원하지 못한 무력감과 죄책감으로 실의에 빠진 신부 상현은 백신 개발 실험에 자원하려고 아프리카로 떠난다. 바이러스에 감염돼 죽음을 맞게 되지만, 수혈 과정에서 상현은 다시 살아난다. 이를 기적으로 여긴 신도들은 상현을 성자로 떠받든다. 하지만 그는 흡혈귀로 부활했으며, 이 때문에 피와 쾌락을 향한 욕망과 성직자 윤리 가운데서 고민한다. 그런 상현 앞에 욕망의 화신 태주가 등장한다.
■흡혈귀, 적대적 타자로서의 자본주의
흡혈귀가 인류 문화사의 아이콘으로 정착한 이래, 흡혈귀 소재 영화에는 다음과 같은 분석이 적용된다.
남들이 일하는 낮에 숙면하고 밤에 활동한다. 노동하지 않고 타인의 피를 빨아먹으며 기생한다. 그러면서도 평범한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며 타인을 자신의 의지대로 조종하는 초월적 지배자. 인간과 비슷한 외양을 하고 군중 속에 섞여 살아가지만, 그들과는 상반된 생리로 살아가는 적대적인 타자. 현대에 와서 흡혈귀는 자본주의 시대의 특권층인 자본가 계급에 대한 은유로 받아들여져 왔다.
'박쥐'는 피를 탐하는 뱀파이어의 식욕과 인도주의적 지성 사이에서 도덕적 딜레마에 처해 선한 의지를 시험받는 인간을 보여준다. 영화는 윤리학에 관한 복합적인 탐구이면서도 자본과 권력이 지배하는 문명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관한 성찰이다. 또 당대의 헤게모니가 민중을 수탈하는 경로를 우화 형식으로 보여준다. 영문 제목이 '악마의 삶'(Evil live)에서 '갈증'(Thirst)으로 바뀐 점이 영화의 성격까지 바꾸진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냉혹한 생리가 흡혈이라는 은유적 표현으로 치환되면서 '박쥐'는 해석학적인 영화가 된다.
상현은 보살피던 환자의 피를 취하거나 자살을 원하는 이들을 인터넷으로 모집해 안락사의 대가로 피를 모은다. 신자들이 피를 내어주면 상현은 그들에게 일시적인 피안을 제공하고, 태주가 몸을 내어주면 상현은 고통을 동반한 가학적 쾌감을 선사한다.
흥미로운 건 '박쥐'에서 상현의 주변 인물들은 흡혈귀의 피해자이면서도 그를 물리쳐야 할 적이 아니라 동경의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착취자에 저항하기보다는 그에 순응하고, 마찬가지로 특권계층이 되기를 바라는 군중의 모습. 흡혈귀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는 어쩌면 신자유주의 시대의 증후일까? 드라마 속 재벌을 바라보는 부러움 섞인 시선들처럼.
■한국식 근대화, 전통·가족 파괴하다
몽유병을 핑계 삼아 태주는 밤마다 집을 벗어나 맨발로 도로를 달린다. 낡은 건물로 둘러싸인 골목길을 달리는 태주의 목적지는 지붕 너머로 보이는 고층 빌딩 세계이며, 하층민인 그녀의 갈망은 상류층의 질서에 편입되는 것이다. 영화의 공간학적 지형도는 상현이 머무는 병원과 태주가 거주하는 한복집을 통해 간편한 이분법적 구도로 분할된다. 병원과 성당은 부와 권력에 걸맞게 단정한 선과 면으로 짜였으나 한복집은 천박함을 강조하는 가지각색의 컬러 외에는 미학적 강조점 없이 평범하게 묘사된다.
성(聖)의 공간과 한복집이란 속(俗)의 공간은 근대(modern)와 구식의 전통을 대비시킨다. 상현과의 불륜 관계를 통해 태주는 무능력한 남편과 한복집으로 표상되는 궁핍과 가난, 가족과 전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외래 바이러스에 감염돼 흡혈귀가 된 이질적 타자 상현은 태주의 남편을 죽이고 라여사를 식물인간으로 만들며, 낡은 한복집의 실내를 아파트처럼 꾸민다. 가족 관계를 파괴하고 모던한 인테리어로 실내 공간을 다시 꾸미는 상현-태주 커플의 행동은 공교롭게도 전통적인 공동체와 가치, 낡은 것들을 무너뜨리고 무너진 빈자리를 깔끔하고 새로운 것으로 채우고자 하는 자본주의적 욕망, 한국식 근대화의 속성과 일치한다.
일시적으로 죽음을 맞았으나 상현의 피를 받아 흡혈귀로 부활한 태주는 거리낌 없이 평소에 알던 주변 인물들의 피를 취한다. 전통적인 가족 관계와 공동체가 깨어지자 친지든 이웃이든 아무런 가책 없이 착취와 흡혈의 대상으로 여긴다. 인텔리인 상현이 내면의 갈등을 겪으며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피를 얻으려 한 반면, 태주의 흡혈은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이며 한계가 없다. 이처럼 '박쥐'는 급속한 근대화, 서구화의 과정에서 가치관을 상실하고 자본주의의 폭력적인 민낯을 대면하게 된 현대 한국의 현실을 풍자적으로 우화한다.
악행에 동조했던 상현은 태주를 끌어안고 죽음을 자청함으로써 이 피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속죄한다. 구원을 가져오려던 시도가 타락과 파멸을 가져오듯, 풍요와 번영을 위한 근대화가 착취와 폭력을 낳는 지독한 아이러니. 둘은 흡혈귀로서 햇살을 맞지만, 인간으로서 죽는다. 마치 '런던의 늑대인간'이나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마지막처럼.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더라도 그 시작은 선의였다'고.
# 박찬욱의 상징 숨기기
박찬욱 감독은 장면의 디테일, 미장센(mise en scene) 속에 교묘히 상징을 숨겨놓기를 좋아한다.
'친절한 금자씨'(2005)에서 이영애(금자)가 사용한 권총의 손잡이에는 그리스 신화 속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의 머리를 새겨 금자의 성격을 암시한 것처럼, '박쥐'에서도 영화의 의미를 함축하는 숨겨진 상징이 있다.
극 중 상현의 소지품에서 발견되는 엽서의 성화(聖畵)는 '성 세바스티앙(사진)'의 순교 장면을 다룬 중세 회화인데, 기둥에 묶인 채 화살을 맞고 죽었다 되살아난 성 세바스티앙처럼 상현 또한 부활할 것임을 암시하는 장치이다.
조재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