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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주를 배경으로 지구를 바라보고 그리워하는 영화 '그래비티'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세계관을 우주로 확대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워너브라더스코리아 제공 |
알폰소 쿠아론의 '그래비티'(2013)는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펼쳐지는 회귀의 드라마이다. 허블 우주 망원경을 수리하는 주인공 일행은 엄밀히 말하자면 완전한 무중력 상태가 아닌, 지구 중력이 미약하게나마 작용하는 극미중력 상태에 있다. 지구 중력의 자장(磁場)을 아주 벗어나 먼 우주로 나아가는가, 아니면 임무를 마치고 다시 지구의 흙과 물을 밟느냐는 선택의 기로. 극 중 인물들은 다른 두 세계의 접점에 있다. 지구 상공을 맴돌던 인공위성 파편이 우주 망원경 수리 작업 현장을 덮치면서 주인공 일행에게 위기가 찾아온다.
동료를 잃고 겨우 살아남은 여성 과학자 라이언 스톤은 우주 미아가 될 위기를 벗어나 지구로 돌아오게 된다. '그래비티'는 90분 남짓한 상영시간 내내 스톤이 고립된 상황에서 외로움과 절망감을 버텨내는 과정을 마치 우주에서 촬영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섬세하게 포착한다. 우주에서의 진정한 공포는 지구 궤도를 돌며 수시로 찾아오는 우주 쓰레기의 파편이 아니라 나의 곁에 아무도 없다는,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고 온기를 나눌 수 없다는 절대적인 고독이다. 영화는 적막하고 차가운 우주와 푸른빛 지구를 대비하며 대지의 그리움을 떠올리게 한다.
■중력, 삶의 조건으로서의 부자유
중력(Gravity)은 만물을 지구 중심으로 끌어당기는 힘이다. 지구 표면에 존재하는 사물이 우주 공간으로 내쳐지지 않고 대지 위에 머물 수 있는 건 중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래비티'에서 감독은 중력을 과학적으로 실재하는 힘인 동시에 인간을 인간답게 살도록 하는 삶의 조건으로서의 '관계'에 대한 은유로 재해석한다.
스톤은 우주로 표류할 상황에서 동료 맷 코왈스키의 도움으로 살아남게 된다. 이때 영화는 두 사람의 우주복을 연결하는(connect) 끈의 이미지를 강조하며, 서로를 끌어당기고 옭아매는 중력 관계가 이어지면 살 수 있지만 끊어지면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우주에 오니까 가장 좋은 게 뭐야'라는 코왈스키의 질문에 스톤은 '고요함'이라 답한다. 아이를 잃고 지구에서의 일상과 인간관계에 염증을 느낀 스톤은 자청해서 우주로 나와 무중력 공간의 고요와 자유를 만끽한다. 하지만 의지할 벽이나 숨 쉴 공기도 없는, 타자와 나를 매개할 그 무엇도 없는 우주의 실체를 경험한 그녀는 '난 우주가 싫어'라고 독백한다.
이처럼 '그래비티'는 끌어당기는 '중력'이 없는 삶, 나를 타자와 이어줄 '관계'가 없는 삶의 공허와 무의미를 응시하면서, 부자유의 조건으로만 여겨졌던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우주에서 다시 지구로 돌아온 스톤은 마치 양수로 찬 자궁에서 빠져나온 아기처럼 수초로 가득한 물속에서 헤엄쳐 올라와 대지에 발을 디딘다. '어울려 사는 세계'의 가치를 새로이 깨달은 존재의 거듭남. 그녀는 이제 다시 자신을 옭아맬 지구의 중력을 버티고, 관계 속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지구(globe)를 떠나 우주로
공간적 배경은 우주이나 정작 '그래비티'는 머나먼 우주의 저편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이 영화에는 지구만이 인류가 살아갈 유일한 터전이자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고향으로 보는 전통적인 세계 인식이 깔려 있다. 그런 점에서 알폰소 쿠아론의 철학적 발상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1972)를 21세기에 새로운 버전으로 부활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하나뿐인 지구'라는 말처럼 지구(globe)를 세계(world) 그 자체로 보려는 이런 사유가 지구라는 영역 안에 인류의 활동 영역을 고정하는 우를 범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우주 역시 인류에게 세계가 되었으며, 미래의 인류가 더욱 넓은 세계로 나갈 무한한 가능성을 쥐게 되었음을 쿠아론 감독은 살피지 못한다. 허블 망원경이 파괴되는 장면은 우주를 전망하지 않고 지구 안으로 세계를 한계 지으려는 감독의 인식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그런 점에서 '그래비티'는 여전히 '우주영화'가 아닌 '지구영화'의 한계에 머문다.
우리는 보통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활동하는 영역을 세계(world)라고 부른다. 로마나 중국은 지구의 육지 중 극히 일부만을 정복하고 문명화했을 따름이지만 자신들의 영역을 '세계'(mvndi)나 '천하'(天下)로 규정했다. 중세 유럽사회는 '지리상의 발견' 전까지 지중해 연안만을 세계로 보았으며 그 너머에는 세상의 끝이나 연옥이 있다고 믿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정보통신과 운송 기술의 발전으로 지구촌화(globalization)가 이뤄지고 나서야 우리는 세계라는 단어를 지구 전역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세계라는 개념은 고정된 결과가 아닌, 항상 진행 중인 과정의 개념이며 인류의 시선과 발걸음이 뻗어 나가는 만큼 세계의 외연은 얼마든지 팽창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그래비티'가 지구 전체의 풍경을 보여주는 장면은 감독의 의도와 달리 우리에게 세계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성을 던져준다.
우주에서 지구를 관찰하게 된 시점부터 인간에게 지구는 하나의 지역(local)이 되었으며, 우주 또한 우리가 활동해나갈 세계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비티'의 향수 너머엔 무엇이
철학자 김용석은 '문화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에서 지구의 모든 영역을 개척하는 전지구성(globality)을 뛰어넘어 앞으로는 지구를 벗어나는 탈지구성(Post-globality)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인류 문명이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전지구화는 인류가 지구에서 이루는 역사 발전의 마지막 단계일지도 모른다. 그 이후의 역사는 지구 밖에서 시작할지도 모른다. 전지구화가 완결되기 전에 인류는 탈지구를 준비한다'.
지구를 벗어나 다른 행성으로 이주하는 SF소설과도 같은 작업이 당장 현실화하지 않더라도, 우주를 향해 눈길을 돌리게 된 인류와 문명이 그런 발전 방향에 따라갈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탈지구화의 시대는 이미 열려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제까지 인류의 문명사는 지구라는 영역 안에 국한되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불안한 시선 한편으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저 너머의 우주를, 더 넓은 가능성의 지평을 응시해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그래비티'의 향수(nostalgia)를 넘어서서 내다보는, 새로운 천년을 위한 미래의 제안이 될 것이다.
# 케슬러 신드롬이란
'케슬러 신드롬'은 미 우주항공국(NASA) 도널드 케슬러 박사가 1978년 발표한 것으로, 우주에 떠도는 인공위성과 우주선의 잔해 등이 충돌하면서 발생한 파편이 연쇄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음을 말한다.
실제로 2007년 중국이 폐기된 기상위성 FY-1C를 파괴하기 위해 KT-2 미사일을 발사했지만, 미사일이 위성과 충돌하면서 파편 3300개를 만들어 위험에 빠뜨렸다. 2009년에는 통신위성 이리듐33이 러시아의 폐기된 군사위성 코스모스2251과 충돌해 공중 폭발한 적이 있다.
NASA에 따르면 지구 궤도에 2만 개의 우주 쓰레기가 널려있으며, UN은 우주 쓰레기 경감 지침을 만들어 우주 물질을 제거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있다.
조재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