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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래디에이터'는 한 남자의 복수극이자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운 영웅의 이야기이다.
이와 함께 이 영화는 정치권력과 대중매체의 관계를 풍자하며 민주주의의 진정한 의미를 이야기한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
리들리 스콧의 '글래디에이터'(2000)는 21세기 영화계에 르네상스를 불러온 작품이다. '벤허'(1959)의 성공으로 로마시대를 배경으로 한 대규모 역사극이 유행했지만, '클레오파트라'(1963)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명맥이 끊겼다. 하지만 이 영화가 성공하면서 새로운 역사극 영화 전성기가 열린다. 사실주의적인 연출과 고증으로 사라져버린 고대 로마를 생생하게 되살린 '글래디에이터'는 현대 역사극의 기준점이 되었다.
오현제(五賢帝)시대 마지막 인물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서거하고 폭군 코모두스가 즉위하자 로마제국은 '3세기의 위기'를 맞는다. '명상록'을 쓴 스토아 철학자이자 현명한 정치가였던 아우렐리우스의 죽음은 비록 아들이라 할지라도 코모두스 같은 부적격자를 후계자로 지명할 리 없었을 것이란 아쉬움을 낳는다. 이는 그가 암살당했으리라는 의구심으로 이어졌고, 많은 역사가의 상상을 자극했다. 이런 가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스티븐 보이드 주연의 '로마제국의 멸망'(1964)이었고, '글래디에이터'는 비슷한 이야기를 새롭게 각색한다.
'글래디에이터'는 가족을 잃고 노예 신세로 전락한 남자 막시무스의 복수극인 동시에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우는 투사적 영웅의 이야기, 저항의 서사이다. 그렇다면 막시무스가 저항하고자 하는 권력의 실체는 무엇이며, 그가 해방하려는 민중의 성격은 어떠한가? 무엇보다도 '글래디에이터'는 정치권력과 대중매체의 관계에 관한 풍자적 메타시네마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검투, 미디어를 은유하다
독일의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는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국민 여론의 이중성에 관해 논하며 여론의 유형을 '공중(公衆)의 의견'과 '일반 대중(大衆)의 의견'으로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공중의 의견'은 정치에 관해 합리적인 비판과 검증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대중의 의견'은 오히려 권력자와 헤게모니 계층의 의향에 의해 쉽게 조작·이용당할 수 있으며, 따라서 객관적인 공공선(公共善)을 담보할 수 없다.
하버마스의 주장은 이렇다. 일정한 재산만이 아니라 지성과 교양을 정치 참여의 중요한 자격으로 여겼던 부르주아 중심의 근대 시민민주주의는 여론의 합리성과 타당성을 비판적으로 토론하고 검증할 수 있었다. 반면 19세기 이후 보통투표권의 허용으로 대중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대중민주주의 시대에 들어서는 여론이 정치 토론과 합의, 비판 기능을 잃어버렸다. '글래디에이터'에서 묘사되는 고대 로마의 사회상은 하버마스가 지적하는 대중민주주의 사회의 속성과 일치한다. 민중의 불만을 잠재우려고 코모두스가 대규모 검투 대회를 열자 군중은 정치 대신 콜로세움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유희에 몰두한다.
권력은 미디어 장악으로 대중의 여론을 좌지우지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 (3S 정책의 예처럼)현대 정치 엘리트들이 대중매체, 미디어를 장악해 국민을 우민화(愚民化)하며 여론을 조종하듯, 코모두스 같은 로마 위정자들 역시 오락거리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군중을 다루었다. 검투는 현대 스포츠나 예능으로, 콜로세움은 대중매체로, 로마인들을 현대 대중으로 바꿔 이해해보면 어떨까? 콜로세움의 경기에 흥분하는 관중을 두고 일방적인 미디어의 무비판적 수용자이자 소비의 노예로 전락한 현대인의 자화상을 비춰볼 수 있지 않겠는가? 이런 환원적인 독법에 따르면 '글래디에이터'는 황혼이 찾아온 현대 민주주의와 대중의 속성에 관한 비판적 텍스트일 수 있다.
■'영웅-스타', 군중을 사로잡다
배우가 연출자보다 우선해선 안 된다. 운동선수는 게임의 주최자보다 강력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연극과 스포츠의 정치적 룰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막시무스는 이 암묵적인 규칙을 당당히 위반한다. 온 로마 시민의 시선이 집중된 무대 한가운데서 일개 검투사 노예가 황제에 맞서 명령을 거부한다. 개인의 능력이 권력에 맞설 수 있음을 입증하는 표상의 출현은 곧 대중의 권력 경시로 이어진다. 대중의 여론을 휘어잡기 위해 마련된 오락의 장이 순식간에 정치 저항의 장으로 뒤집히는 역전의 장면을 보게 된다.
검투사 양성소 주인인 프록시모는 막시무스에게 말한다.
"내가 최고가 돼 여기까지 올라온 것은 내가 상대를 빨리 죽여서가 아니라 군중이 나를 좋아했기 때문이야. 군중을 사로잡으면 자넨 자유롭게 될 걸세."
막시무스는 일개 검투사였지만, 그가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게 되자 코모두스는 그를 함부로 처리하지 못한다. 권력기반인 민중의 지지 상실이 두려웠기 때문. 막시무스는 고전적인 비극의 인물이지만, 그의 저항은 군사적인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콜로세움이라는 미디어, 대중 여론의 장(場)을 장악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연예인, 스타에 가깝다.
이 점에서 '글래디에이터'는 고대를 배경으로 삼으면서도 무척이나 현대적인 정치 대안을 내놓는다. 미디어-콜로세움은 권력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지만, 그 안에서 검투-공연행위를 하는 주체는 엄연히 민중이다. 따라서 선전과 세뇌의 수단으로 전락하기 십상인 미디어가 반대로 민중의 계몽과 혁명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황제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패한 상대 검투사의 목숨을 거두지 않음으로써 개인의 자유의지를 천명하는 막시무스의 모습에 대중이 감동하고 지지 의사를 표시하는 장면은 이 영화가 지닌 정치적 담론과 희망을 가장 감동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일 것이다.
■올바른 공론 회복 어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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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휘 |
하버마스는 정치 엘리트들이 살롱이나 카페에 모여 앉아 문학과 예술을 논하고 정치적인 의사도 표출했던 근대 시민민주주의의 토론을 '이상적 의사소통 조건'(ideal speech condition)을 갖춘 '공론의 장'(public sphere)으로 보았다. 그러나 리들리 스콧 감독은 '글래디에이터'에서 역으로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도 대중의 정치적 무지(無知)와 무관심을 깨치고 올바른 공론(公論)을 회복할 가능성을 바라본다. 역설적이게도 그 희망은 미디어를 통해서, 스타를 통해서 가능할지도 모른다.
공인(公人)에게 요구되는 도덕성을 연예인에게 요구하는 것은 그들이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적지 않다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현실에 참여'하는 연예인의 모습에서 미래 정치의 조형을 보는 것도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의 한 형태가 아니겠는가?
# 콜로세움에 관하여
콜로세움(사진)의 정식 이름은 플라비우스 원형경기장(Amphi-theatrum Flavium)이다. 라틴어에서 암피(Amphi)는 한 쌍이라는 말로, 반원형 극장(theatrum) 두 개를 합친 형태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명칭이다.
별칭인 콜로세움(Colosseum)은 경기장 근처에 있었던 네로 황제의 청동상(Colossus Neronis)에서 유래했다. 네로가 폭군으로 단죄당한 뒤 청동상의 머리는 태양신 아폴로의 것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5만 명 인원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 거대한 건축물은 정권에 대한 지지를 확인할 수 있는 여론조사의 장이었다. 황제가 입장할 때 군중은 환호하거나 침묵하는 등 반응으로 지지 여부를 표했다.
조재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