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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경험했던 로만 폴란스키는 '피아니스트'를 통해 폭력의 잔인함을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드러냈다. |
로만 폴란스키(1933~)에게 '피아니스트'(2002)는 피할 수 없는 과제와 같았다. 영화감독이기 이전에 한 개인으로서 폴란스키는 바로 유대인 대학살, '홀로코스트'(Holocaust)라 불리는 대참사의 현장을 경험했던 생존자였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1939~1945) 중에 폴란드 크라코우에서 유년기를 보냈던 그는 아버지와 함께 수용소로 끌려가는 걸 피했지만, 어머니를 아우슈비츠의 가스실에서 잃었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1993)의 연출을 폴란스키에게 의뢰했던 건 유명한 일화이다. 각본을 건네받은 폴란스키는 숙고를 거듭하다 스필버그가 제안한 감독직을 정중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미안하오. 하지만 이건 내겐 너무나도 개인적인 내용이오." 다른 이들에게 지난 역사의 한 페이지인 사건이 그에게는 평생 지워지지 않을 삶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이는 뒤집어서 생각하면 폴란스키만큼 홀로코스트란 소재를 진정성 있게 다룰 수 있는 감독이 드물며, 그가 만드는 홀로코스트 영화가 뛰어난 수작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그리하여 탄생한 '피아니스트'는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중 가장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영화가 됐다.
■모든 폭력은 '경계'에서 출발한다
폴란드계 유대인 피아니스트인 브와디스와프 슈필만(1911~2000)의 수기는 생존 드라마 그 자체이다. 한 피아니스트가 가족을 잃고 살아남기 위해 혼자서 게토(유대인 거주구역)를 헤매는 이 실화는 당시를 목격했던 감독의 경험에 꼼꼼한 고증이 더해져 영화에 재현됐다. 그러나 감독은 '피아니스트'를 단순한 역사의 재현에 그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영화는 '폭력을 가능케 한 근본 원리가 무엇이었는가'라는 철학적 성찰을 관객에게 요구한다.
'피아니스트'는 '경계'의 드라마다. 공간적 배경인 게토는 높고 견고한 담장으로 둘러쳐진 폐쇄적인 장소로 그려진다. 담장은 유대인들을 가두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물이다. 나치 독일의 법은 유대인이 다른 민족과 어울리고 섞이는 것을 금지하기 때문에 담장을 통해 도시를 구획 짓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철저하게 끊어 놓는다. 담장의 안과 밖, 건물 내부와 외부, 건널목 차단기와 창문, 철조망 쳐진 포로수용소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시종일관 경계의 이미지와 경계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인간들의 분열상을 담는 데 초점을 맞춘다.
담장 아래 구멍을 드나들다 맞아 죽는 꼬마, 담장 너머 폐건물을 요새 삼아 저항하는 레지스탕스와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대포로 벽을 뚫어버리는 독일군 등 영화는 경계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폭력적인 상황들을 슈필만의 시점으로 보여준다. 경계는 '구별하기'를 위한 장치다. 유대인과 비유대인, 독일의 적과 아군을 식별하고 솎아내기 위한 차별의 논리가 나치의 인종주의였다면, 이를 시각화하는 것이 영화에서 보이는 다양한 경계의 이미지들이다. '경계 안'에서 나치의 가치에 부합되는 이들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자들을 '경계 밖'에서 포획되어 가차 없이 제거당했다.
■에피스테메(episteme), 이성의 체계
근대 문명과 합리적 이성의 승리를 구가하던 서구 사회의 20세기가 어떻게 홀로코스트와 같은 반인류적 범죄로 치달을 수 있었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이는 지극히 '이성적인 근대적 주체'이기에 가능했다. 인간 이성을 가리키는 그리스어 로고스(logos)는 본래 '센다, 모은다, 배열한다'를 뜻하는 동사 레게인(legein)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이성이란 일정한 질서, 가치구분표에 의해 사물을 구별 짓고 정리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미셸 푸코는 이처럼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의 질서를 규정하는 지식과 권력의 체계를 '에피스테메(episteme)'라 불렀다. 근대에 들어서 서구사회는 자신들의 가치관을 준거로 삼아 세계를 바라보는 사고의 틀을 형성했다. 서양이라는 지리적 기준에서 동양을 변방으로 삼았으며, 민족을 단위로 한 근대국가는 자국의 질서에 편입되지 못하는 타민족을 솎아내 억압하고 차별했다. 동일자가 아닌 모든 것을 타자로 규정지으면서, 자신들의 질서에 속하지 않는 '경계' 밖에 놓인 이질적 타자들을 식민화의 대상으로 바라본 것이다.
유럽 사회 안에서는 유대인들이 그랬다. 유럽인들에게 있어 유대인은 '같은 영토 속의 타자'에 지나지 않았다. 폴란스키 감독은 '피아니스트'를 통해 경계를 설정함으로써 세계를 바라보는 근대적 이성의 메커니즘이 유대인 대학살의 기저에 깔린 내재적 논리였음을 지적하고 있다.
■예술, 경계를 넘어서는 삶의 전략
그럼에도 '피아니스트'는 사유하는 관객을 위해 작은 희망의 가능성을 남겨 놓는다. 영화의 후반에 슈필만을 발견한 나치 장교 호젠펠트는 슈필만의 연주를 듣고 감명을 받아 그가 유대인임을 알고 있음에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도록 도와준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두 사람 사이의 교감이 '음악'이라는 예술적 형식을 매개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쇼팽의 '야상곡'이 흐르는 연주 장면에서 카메라는 무아지경으로 연주에 심취한 슈필만과 그의 모습에 빠져드는 호젠펠트의 표정에 집중한다. 바로 이 대목이야말로 '피아니스트'에서 가장 감동적인 동시에 위대한 희망을 형용해내는 지점이다. 경계를 넘어 서로 다른 이질적인 존재들을 한데 엮을 가능성을 음악으로부터, 민족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 인류 모두가 공감할 공통의 소통 방식인 예술로부터 찾은 것이다.
물론 이 가능성은 경계의 현실을 전면적으로 뒤바꾸기엔 너무나 미약하다. 종전 후 역으로 철조망에 갇히게 된 호젠펠트의 모습에서 우리는 경계의 현실이 여전히 강고하게 우리의 삶 속에 뿌리박고 있음을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기에 절멸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낸 이 작은 희망이 더욱 값지게 빛나는 것이리라. 비록 한 사람의 구원이었지만 '피아니스트'는 우리에게 경계를 초극해 인간으로서의 공감대를 회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그것이 예술(art)이라고 답한다. 예술의 본질이 무엇이었던가. 서로 공유하고 서로 향유할 수 있는 공통의 형식, '사람 사이(人+間)'에 다리를 놓는 '사람의 문양(人文)'이 아니겠는가.
# 홀로코스트를 다룬 영화
-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부터 스티븐 달드리의 '더 리더'까지
20세기 역사에 깊이 각인된 인류의 비극인 유대인 대학살을 기록하고 재현하려는 노력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다큐멘터리로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1955)가 2차 대전 당시의 기록 필름과 10년 뒤 폐허가 된 수용소의 모습을 번갈아 보여주는가 하면, 클로드 란츠만의 '쇼아'(1985)는 장장 9시간30여 분에 이르는 상영시간 내내 당시를 경험했던 생존자와 전범이었던 이들의 인터뷰를 채록해 보여준다.
극 영화로는 1200명의 유대인을 살려낸 오스카 쉰들러의 실화 '쉰들러 리스트'(1993)가 첫손에 꼽힌다. 스필버그의 손으로 만들어져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 '더 리더'(2008)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2008) 등이 잇달아 선보이며 참혹했던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고 있다.
조재휘·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