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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의 공간-부산 근현대의 장소성 탐구 <12> 신나는 '놀이 섬' 사직야구장

맘껏 노래 부르고 "마" 외침, 규율서 해방된 일탈의 공간…조명 꺼지면 외로운 섬으로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3-10-08 19:12:15
  •  |   본지 1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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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야구장은 지난 28년간 '구도 부산'의 열정을 상징하는 공간이자 상시적 시민축제의 장소로 자리매김해왔다. 사진은 막 어둠이 내릴 무렵 조명탑에 불을 밝히기 시작한 사직야구장의 모습. 국제신문DB
- 사직야구장 건립 이전
- 원도심 구덕야구장서 고교야구 등 즐겨

- 1980년대 스포츠시설 도심 외곽으로 이전
- 사직벌 '도시'로 편입

- 노동·일상의 시공간과 구별되는 자유의 공간
- 신문지 찢어 흔들고 비닐봉지 뒤집어써도
- 훌륭한 응원문화 주목

- 밤늦게 경기 끝나면 일상세계로 복귀
- 타인과 개방된 공간서 즐기는 경험은 소중

■프로야구와 사직의 응원

1985년 10월에 완공되어 그 이듬해부터 부산 연고 프로야구팀 롯데 자이언츠의 홈구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부산 동래구 사직동의 사직야구장. 이곳은 부산 야구팬들이 '한국 야구의 성지'라고 으스대는 곳이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야구장도 아니고 30여 년 동안 이곳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횟수가 고작 두 차례뿐임에도 사직야구장이 이 같은 별칭을 얻게 된 데에는 부산 야구팬의 열정적인 응원문화가 큰 몫을 했다.

야구 실력은 최고가 아닐지 몰라도 부산 야구팬의 야구 사랑과 응원 열기는 최고였다. 사직야구장은 처음에는 이동식 스탠드를 설치해 축구, 럭비, 하키 등의 스포츠도 함께 치를 수 있는 종합경기장으로 건설되었지만, 이내 프로야구가 이 운동장을 독점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야구사상 처음으로 100만 관중 동원, 역대 총 관중 500만 명 동원, 5년 연속 100만 관중 동원 등의 기록이 이 야구장에서 달성됐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 최초로 야구인(고 최동원 선수)의 동상이 야구장 입구 한쪽에 세워지기도 했다. 롯데야구단의 전력 저하, 부산과 가까운 경남 창원 연고 야구단의 리그 참가 등의 이유로 비록 올해는 만원 관중을 보기가 힘들어졌지만, "한국에서 제일 열광적이고 부산만의 방식"으로 진행된다는 영국 BBC방송국의 보도(2012년 10월 29일)가 말해주듯 사직야구장에 모인 부산 야구팬의 응원문화는 독특하고 대단하다. 이 때문에 사직야구장은 롯데 야구를 응원하는 동시에 응원 자체를 느끼고 즐기기 위해 찾는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부산시는 이곳을 부산 관광 노선에 포함했다.

■식민도시·주변 공간에서 벗어나

   
지난달 14일 부산 사직야구장에 세워진 최동원 동상. 국제신문DB
한국의 다른 야구장과 비교할 때 혹은 외부인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사직야구장이 위와 같다면, 부산의 각 공간 형성과 배치 혹은 부산 시민의 관점에서 볼 때 사직야구장은 어떤 공간인가. 이를 살피기 위해서는 사직야구장 건설 이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야 한다. 사직야구장을 비롯해 아시아드주경기장, 실내체육관 등이 밀집한 부산종합운동장 건립 이전에 부산의 스포츠 메카 공간은 구덕운동장이었다.

서구 서대신동에 있는 구덕운동장은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에 부산공설운동장으로 건립된 부산 유일의 시민종합운동장이었는데, 구덕야구장은 1971년에 세워졌다. 프로야구가 출범하기 이전 구덕야구장에서 열린 야구경기 중 가장 인기 있던 건 고교야구였다. 구덕야구장은 타 지역의 고교야구부와 경쟁할 부산의 대표 고교야구부를 결정하는 공간, 즉 현재 소속 혹은 출신 학교에 대한 애정과 깊이 연결된 공간이었다. 애향심보다는 애교심이 더 강렬하게 표출되는 공간이었고, 사직야구장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상업성이 덜 개입된 공간이었다. 롯데 자이언츠는 1982년부터 4년 동안 이 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했는데, 이 기간은 애교심을 애향심으로 확대 수렴 혹은 전환하는 시기였다.

식민도시 부산은 일본과의 통로였던 항구를 중심으로 각종 시설물이 밀집해 있었는데, 이는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이어졌다. 그러다 1980년대 들어 원도심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각종 시설이 도시 외곽으로 이전하기 시작했고 스포츠 시설물도 도시 외연의 확장에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다. 도시는 단일 목표를 효율적으로 성취하기 위해 공간적 인접성을 강조하던 데서 벗어나 공간을 확장하고 분할한 후 각 공간에 특징적인 성격을 다양하게 부여하여 전체 공간의 위계 구도를 형성하는 방식을 택하기 시작했다.

당시 사직야구장이 들어설 일대는 이주홍의 소설 '지저깨비들'(1966년)이 묘사했던 그대로를 거의 유지하고 있었는데, 미나리꽝이 그것이었다. 근대도시에 어울리지 않는 농촌의 풍경이 분할된 기능적 공간으로 재편되면서 도시 속으로 실질적으로 편입해 들게 된 것이다. 사직야구장의 건설은 부산이 식민지적 도시 배치 양식에서 탈피하고 대도시적 형상을 구축하는 과정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놀이의 공간

부산도시철도 3호선 종합운동장역에 도착할 즈음이면 굵직하고 약간은 어눌한 남성 선수의 목소리가 여성 목소리를 대신해 안내 방송한다. 여타의 지하철역 안내방송과는 확연히 다른 이 목소리는 사직야구장의 성격을 특별한 것으로 구성해낸다.

노동·일상의 시공간과 구별되는 자유, 그리고 나름의 규칙의 시공간이 펼쳐질 것이라고 예고하는 듯하다. 도시철도를 타기 직전까지 짓눌러왔던 노동의 압박과 각종 규율은 남성 선수의 목소리 뒤로 슬그머니 사라진다. 큰 목소리로 맘껏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고성방가라는 경범죄를 걱정할 필요가 없으며 나 혼자 일어나 신 나게 몸을 흔들어도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다. 신문지를 찢어 흔들거나 붉은 봉지를 뒤집어쓰는 등 도시철도 남성 선수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에는 용납되지 않았던 일들이 이곳에서는 훌륭한 문화로 주목받는다. 1만 원 남짓한 입장료만으로 억대 연봉 선수를 칭찬하거나 욕할 수도 있는 공간이다.

정치권력이 우민화정치를 위해 혹은 애향심을 지역감정으로 변환해 정치에 이용하기 위해 프로야구를 생산했든 말든, 견제하는 상대 투수를 향해 '마'를 외치는 순간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극적인 홈런을 친 선수의 이름을 외치며 손을 번쩍번쩍 들어 올리는 관중들에게서 부마항쟁이나 6월항쟁의 기억을 떠올리려 하거나 희망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회색빛 얼굴을 한 자들의 몫일 뿐이다. 롯데 기업이 부산에 어떤 역할을 했기에 그렇게 '롯데'를 외치는지를 묻는 것도 어리석은 일이다. 사직야구장엔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 때문에 짜릿하고 안타까운 감정들이 순식간에 그리고 집단적으로 뒤바뀌는 양상이 반복해서 넘실댈 뿐이다. 이곳에는 바깥 세상과는 분명히 다른 나름의 규칙이 엄연히 있다. 정정당당한 승패라는 비교적 공정하고 투명한 승부가 펼쳐지는 동안 상대의 응원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래서 오후 6시30분부터 3시간 전후의 사직야구장은 부산 시민의 놀이 공간, 일탈의 공간이다.

■그러나 섬

대형 라이트가 하나둘 꺼지고 사직야구장을 떠날 때 몇몇 사람은 목쉰 소리로 '롯데'를 외치지만, 흥분의 잔여량은 그다지 많지 않다. 더는 낯모르는 사람과 하이파이브하지 않으며 한목소리로 자신들의 바람을 외치지도 않는다. 귀갓길의 혼잡함을 걱정하며 종종걸음을 치는 사람들은 도시철도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는 강민호 선수의 목소리 하나로 간단하게 노동과 일상의 시간에서 탈출한 것처럼 또 그렇게 간단하게 일상세계로 돌아간다. 사그라지는 몇 개의 불빛을 인 채 어두운 실루엣만을 드러내고 있는 사직야구장은 거대한, 그러나 외로운 섬처럼 느껴진다.

감정의 배설 그것도 공통적이고 집단적인 감정(이쯤 되면 일시적이고 본능적인 감각 이상일 것이다)의 표출을 위해서는 사직야구장만으로 충분한가. 몇몇 지인과 함께 밀폐된 노래방으로 들어가 나 혼자만의 목소리를 마이크 안으로 뱉어내는 데 익숙해진 지금 수많은 사람이 넓고 개방된 공간에서 단순한 노래 몇 개를 목청껏 부르는 것만으로도 함께 즐거워할 수 있는 경험은 그 자체로 소중할 터이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사직야구장이라는 공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라면 그래서 그것이 감정의 구매라는 유통구조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면 사직야구장은 일종의 섬일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한국 전체를 '사직야구장'으로 만들었던 경험은 신선하고 소중했다. 그 같은 강렬한 경험이 계속될 수도 없겠고 또 그러하다면 피곤할 터이지만, 섬처럼 고립된 사직야구장은 우리 부산 시민들이 미묘한 감정을 섬세하고 거리낌 없이 표현할 수 있는 작은 놀이 공간들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반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굳이 도시철도 3호선을 타지 않아도 타인의 감정과 움직임에 온갖 종류의 반응을 보이면서 공동체를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공간, 몇 번의 변화 끝에 연고성을 강조하기 위해 엠벌럼으로 채택된 갈매기가 되지 않아도 즉 굳이 롯데(야구)를 통하지 않아도 내 옆의 사람을 이웃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야 건강한 부산일 것이다.

조명기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 HK교수·문학박사·한국현대소설 전공


※공동기획 :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로컬리티의인문학연구단, 국제신문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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