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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일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 교정의 정지용 시비 앞에서 경희대 국문학과 교수인 박주택(왼쪽) 시인이 정지용 윤동주 시인의 문학세계에 대해 문학기행 참가자들에게 즉석 강의를 하고 있다. 이승렬 기자 |
- 윤동주의 '서시'비와 정지용의 '압천'비가
- 두 시인의 모교인 日 교토 도시샤大에
- 나란히 서 있다
- 참배객들이 두고 간 필기구와 꽃다발이
- 다소곳이 놓여 있다
부산 경남과 서울의 시인 등 10여 명이 가을 들머리에 일본으로 문학기행을 떠났다. 일본의 천년고도 교토(京都)에 있는 한국 대표시인 2명의 시비를 참배하고 그들의 문학세계를 되짚어보기 위한 자리였다. 주인공은 한국 현대시단을 화려하게 수놓은 윤동주와 정지용 시인. 아울러 이번 문학기행 참가단은 나고야에서 일본의 시인들과, 오사카에서는 재일교포 문인들과 문학교류 행사도 열었다. 참가 문인은 서울의 문정희 박주택 한성례 정혜선 시인과 부산의 한창옥 전명숙 김성배 시인, 경남의 송미선 김이듬 시인 등이다.
■정지용과 윤동주, 그 묘한 인연
교토 도시샤(同志社) 대학 교정에서 시비의 모습으로 나란히 서 있는 정지용과 윤동주 시인은 참 기묘한 인연으로 얽혀 있다.
시인 윤동주(1917~1945)는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도 펴내지 않았고 문단활동도 하지 않았다. 교지 등에 가끔 시를 싣기는 했지만, 작품 대부분은 혼자 일기 쓰듯 시를 썼을 정도로 무명의 학생 시인이었다. 일본 유학 시절이던 1943년 7월 14일 한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일본 경찰에 의해 사상범으로 체포돼 재판까지 받고 감옥에 갇혔다. 조선어로 된 일체의 글을 쓰지 못 하게 했을 정도로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정책이 극에 달하던 때였다. 일부 문인은 아예 붓을 꺾었고, 더 많은 문인은 일본어로 글을 썼다. 일부는 심지어 친일 성격의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런 암흑의 시대에 한글로 시를 썼다는 것이 문제가 돼 윤동주는 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일제 패망을 눈앞에 두고 있던 1945년 2월 16일 그는 차디찬 후쿠오카 감옥에서 사망함으로써 28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사인도 명확하지 않다. 생체실험에 이용됐다는 설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지만, 여전히 의문투성이다.
윤동주 시가 빛을 본 것은 그의 사촌과 친구가 유고를 정리해 1948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펴낸 덕택이다. 1980년대 이후 각종 설문 조사에서 단골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뽑힐 수 있었던 것도 이 시집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윤동주의 유고시집에 서문을 쓴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또 한 명의 대한민국 대표시인 정지용(1902~1950)이다.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 속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詩)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일제시대에 날뛰던 부일 문사(附日 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앝을 것뿐이나, 무명(無名)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限)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참으로 절절한 후배 사랑과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문장이다. 그런데 정지용은 이보다 앞서 윤동주를 소개한 일이 있다. 해방 후인 1947년 경향신문 2월 13일 자에 당시 주간으로 있던 시인 정지용이 윤동주의 유작인 '쉽게 씌어진 시'를 소개, 처음으로 세상에 널리 알린 일이다. 15년 연상이었던 정지용 시인을 흠모했던 윤동주는 자신의 우상이 다닌 대학교라는 이유로 1942년 도시샤대학 영문학부로 편입해 들어간 것으로 전해진다. 같은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도 작용했다. 그것이 오히려 그의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된 것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10m 곁에 서서 작은 비석으로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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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동주 시비. |
문학기행 일행은 지난 9일 해그름녁에 교토 도시샤대학 교정을 찾았다. 이곳에는 윤동주 시비와 정지용 시비가 10m 간격을 두고 나란히 서 있다. 두 시인의 시비는 학생들과 참배객들이 꽂아 놓은 연필과 펜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누군가 두고 간 꽃다발은 대문호들의 문향(文香)과 어우러져 더욱 짙은 향기를 내뿜는다. 문학기행에 참가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옷깃을 여미고 고개 숙여 묵념을 하며 두 시인의 명복을 기렸다.
이윽고 경희대 국문학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박주택 시인이 윤동주 정지용 두 시인이 한국 시단에서 차지하는 무게와 현대시에 끼친 영향에 대해 짤막하지만, 인상적인 즉석 강연을 펼치기도 했다. 또 시 '돌아가는 길'로 2004년 제16회 정지용문학상을 받은 바 있는 문정희(동국대 겸임교수) 시인은 "정지용 시인은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라며 깊은 감회에 젖었다.
1920년 대학 학제에 편입됐고, 이미 1870년대에 가톨릭 계열의 신식 학교로 개교한 도시샤대학은 교토의 유서깊은 명문 사립대학이다. 이곳에 한국 시단을 대표하는 윤동주와 정지용 시비가 나란히 세워진 것은 많은 이들의 노력과 학교 측의 열린 자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먼저 세워진 것은 윤동주 시비다. 후쿠오카 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은 청년 시인의 50주기를 맞아 1995년 2월 16일 제막됐다. 도시샤대학 출신 재일교포 친목단체 '도오시샤 코리언 클럽'이 학교 당국과 끈질긴 협의 끝에, 교정에 시비를 건립하게 된 것이었다. 앞서 1990년 윤동주의 시 작품이 일본 고교 검정교과서에 실린 것도 학교 측이 120년 역사상 최초로, 그것도 한국인 시인의 시비 건립을 허용한 배경이 됐다. 윤동주 시비의 앞면에는 한글과 일본어로 그의 대표작 '서시'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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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용 시비. |
정지용 시인의 시비는 그로부터 10년 후인 2005년 12월 18일 재막됐다. 윤동주 시비 오른쪽 10m 지점이다. 시인의 고향인 충북 옥천군과 옥천문화원, '정지용 기념 사업회' 회장을 역임한 오양호 인천대 교수 등의 노력으로 고향의 돌로 만든 시비를 모교인 도시샤대학에 건립할 수 있었다.
한국 시단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정 시인의 시비에는 앞면에 한글과 일본어로 '압천(鴨川·카모가와)' 전문이 새겨져 있다. 카모가와는 도시샤대학 인근에 있던 강의 이름. 유학생 정지용이 이 강변을 자주 거닐었다고 전해진다.
이날 시비 참배에는 일본 최고의 소설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과 쌍벽을 이루는 최고의 시 문학상인 'H씨 상'을 2004년에 수상한 일본의 대표적 여류시인 가와즈 키요에 씨가 동행해 이목을 끌었다. 가와즈 시인은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을 뒤늦게 알고 그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다 보니 윤동주 시인을 알게 됐다. 그 이후 오사카 등에서 '윤동주를 사랑하는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성배 시인은 이날 "적어도 교토를 방문한 한국인이라면 도시샤대학을 찾아가 암흑기에도 영롱한 별처럼 살다간 시인들의 삶과 문학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하나. 정지용 시인의 정확한 사망 경위와 시점은 월북 납북 등의 논란과 함께 여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1990년대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대백과사전' 17권에는 '개성적인 민요풍의 시인으로 광복 이후 진보적 문학운동을 펼쳐온 정 시인이 50년 9월 25일 사망했다'고 기재돼 있다. 이 글이 실리는 바로 오늘이다.
#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속 '금각사'가 바로 이 건물
- 문학성과 기행으로 유명한 일본의 대표 우익 문인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소재
일본 국보와 중요문화재의 20%가 있다는 교토는 문학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도시이다. 특히 대표 관광지에 속하는 금각사(金閣寺·킨카쿠지·사진)와 청수사(淸水寺·기요미즈데라)는 빠트릴 수 없다.
금각사는 일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1925~1970)가 1956년 펴낸 장편소설 '금각사'의 배경이자 주된 소재가 된 곳이다. '너무 아름다워 불을 질렀다'는 말로 유명한 소설 금각사의 상징인 황금색 3층 누각은 실제로 불에 탔다가 1955년에 재건됐다. 미시마 유키오는 이후 극우운동에 심취했다가 1970년 도쿄의 방위성 본청 건물에서 할복자살한 대표적인 우익 문인으로 알려졌지만, 소설 '금각사'에서 보여준 힘 있고 세밀하면서도 화려한 문체, 치밀한 구성 등은 수많은 작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이 소설로 두 차례나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고, 그중 1967년에는 그를 추천했던 스승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공동 후보에 올랐다가 스승이 수상자로 결정되자 진심어린 축하의 말을 전하기도 했던 일화도 갖고 있다. 1999년 불과 24세의 나이로 소설 '일식'을 써서 일본 최고 소설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받은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38)는 올봄 한국을 방문했을 때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금각사'가 없었다면 내 문학도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778년에 건립된 고찰인 청수사는 일본 고전문학의 최고봉으로 불리는 겐지모노카타리에서 수시로 배경으로 등장한다. 근세 이후에는 가부키의 주 무대로 등장하기도 한다. 금각사와 청수사 두 곳 모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곳이기도 하다.
▶주최=롯데백화점·부산문화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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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문의=http://문학기행.kr
교토=이승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