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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옥의 시서. |
- 조선통신사 써준 글 가보로 전하거나
- 금품받고 구해 판매 중개인까지 등장
- 제술관으로 사행길 따라나선 신유한
- 일본 구전노래·남창제·기생 모습 등
- 법과 제도 신앙 풍속 문화 음식까지
- 일기와 시로 '해유록'에 상세히 기록
-'열하일기'와 더불어 사행문학 백미로
"저들 땅에서 수응한 시가 모두 몇 수가 되는가."
"적은 수라 감히 자세히 말씀드릴 것은 없습니다만 거의 2000수가량 됩니다."
1764년 7월 8일, 일본에서 임무를 마친 통신사가 입시하였다. 영조는 특별히 제술관 남옥과 세 명의 서기(김인겸·성대중·원중거)를 불러 그들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전에도 일본으로 떠나는 네 문사(文士)를 친견하면서 시 짓는 능력을 직접 시험했던 영조였다. 약 11개월의 사행 노정에서 제술관 남옥이 일본인과 주고받은 시는 2000수가 넘었으며, 세 명의 서기 역시 각각 1000수가 넘는 작품을 지었다고 한다. 이렇듯 제술관과 서기의 문학 활동은 조·일 문화 교류의 한 축이었고, 통신사를 파견하는 조선 조정에서는 삼사(三使)만큼이나 제술관과 서기의 선발에 신경을 썼다.
■제술관은 문명을 떨치던 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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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술관 신유한의 시서. |
사실 제술관과 서기의 선발은 조선 후기 통신사의 파견 목적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 정부는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과의 새로운 관계 정립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는 자칫 오랑캐에게 머리를 숙이는 것으로 비칠 수 있었기에 일본의 강화 요청을 섣불리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래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조선 정부는 포로 쇄환과 일본 교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통신사를 파견하였다. 그리고 통신사의 파견이 일본의 관백 습직에 대한 하례 사절로 정례화하면서 조선 조정에서는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한 일본 교화에 더 큰 명분을 부여하였다.
이에 따라 당대 최고의 화원과 의원 등이 통신사 원역으로 선발되었다. 특히 문명 교화의 강력한 수단인 시서(詩書)를 담당하는 제술관은 조선에서 문명(文名)을 떨치던 문사만이 맡을 수 있었다. 기해사행(1719)의 제술관 신유한은 "조선 선비 중 문장에 능한 사람을 선택"하여 "우리나라의 문화를 선양"해야 하므로 조선의 문사들이 "칼날이나 화살처럼 무서워"하는 자리라고 제술관에 대해 설명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더불어 사행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 '해유록'을 쓴 문장가 신유한조차도 직책에 대한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제술관으로서의 막중한 책임감에 왕복 만 리가 넘는 수륙노정으로 육체와 정신 모두 힘들었지만, 사행길에 오르는 그 순간부터 신유한은 자신의 경험을 일기와 시로 기록했다.
■최고 인기 제술관 신유한과 해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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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상휘호도'. 1711년 통신사 일행이 에도를 행진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소동에게 휘호를 써달라고 부탁하는 광경을 하나부사 잇쵸우가 그린 것이다. '마음의 교류 조선통신사' 수록. |
'해유록'에는 신유한이 제술관의 임무를 수행하는 기록이 많이 보인다. 그 당시 조선 시서(詩書)와 글씨에 대한 일본인의 관심은 대단하여 통신사 노정에는 통신사의 글을 구하려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조선의 글씨를 지니면 복이 온다는 속설이 떠돌아 통신사의 글을 가보로 전하는 일본인이 생겨났고, 종내에는 금품을 받고 통신사의 시서를 구해주는 중개인까지 등장할 정도였다. 신유한 역시 경유하는 일본 곳곳에서 밤늦도록 지역의 일본 문인과 필담창화를 하거나 작품의 서문을 써주었는데 이런 일이 다반사다 보니 오히려 글을 요구하는 이가 없는 날을 기이하다며 일기에 썼을 정도였다.
그러나 글을 요구하는 일본 문사보다 신유한을 더 힘들게 한 일이 있으니 바로 문학에 조예가 없는 태수에게 허리를 굽히고 시를 지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조선의 문관으로서 자부심이 강했던 신유한은 결국 백금(白金) 한 봉지에 자신의 글을 팔 수 없다며 대마도주에게 글을 써서 바치던 전례를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행동이 후대 통신사들의 전례가 됨을 자각한 신유한은 일본 관리와의 갈등을 '해유록'에 낱낱이 기록하였다. 실제로 기해사행 이후 대마도주가 제술관을 불러 글을 짓게 하고 상금을 내리는 예는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신유한은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일본, 일본인의 모습을 시로 적어 '해유록'에 남겼다. 일본 민간에 구전되는 노래에서부터 심지어 일본의 남창제도('남창사'), 유곽과 기생의 모습('낭화여아곡') 등 이전의 사행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일본의 풍속까지도 악부시로 표현했다. 신유한은 일본의 풍속을 괴이하다 평가하면서도 통사(通詞)를 거쳐야 하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수십 편의 시로 옮겼다. '있는 그대로의 일본'을 기록하기 위한 신유한의 노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해유록'의 체재에서도 잘 드러난다. 신유한은 '문견잡록'을 별도로 설정하여 일본의 제도와 법, 신앙에서부터 꽃과 채소, 음식에 이르기까지 일본의 다양한 면모를 60여 항목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조선과는 다른 문화와 풍습을 가진 일본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다름을 인정하려고 노력했던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일면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혹자는 '해유록'에는 신유한의 일본 인식의 한계가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해유록'에는 일본의 산천을 보고 아름답다 감탄하다가도 그런 '선경(仙境)'이 '이무기와 도적의 소굴'에 있다고 한탄하는 글이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중화'와 '오랑캐'라는 이분법적 사고에 익숙했던 조선의 지식인이 오랑캐 일본의 현재를 가감 없이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는 변화다. 자신에게 과일 하나를 건네는 일본 아이를 만난 날, 신유한은 '정(情)'의 나눔에는 저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고 일기에 적었다.
세계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여전히 '나' 혹은 '우리'가 아닌 '다른' 사람·민족·국가를 이해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그런데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이해, 문화적 상대주의의 자각은 그저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 신유한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과는 다른 일본, 또 일본과는 다른 한국을 인정하려는 노력이 시작되는 순간, 냉각된 한·일 관계에도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18세기 한 제술관이 남긴 조선통신사 기록의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 영조 때 서기로 파견된 성대중의 사행기 '일본록'
- 신유한이 남긴 '문견잡록' 저술 방법·형식 등 모방
일본으로 떠나는 통신사행원들이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숙지했던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전대 사행원들이 남긴 기록, 즉 사행록이었다. 대부분의 일을 전례에 따라 처리하는 통신사행의 특성상, 사행 노정에서 발생하는 양국 갈등을 해소하는 기준 역시 사행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계미사행(1764년·영조 임금 시기)의 정사 조엄은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를 비롯하여 전대 사행록을 빠짐없이 숙독하였고 제술관 남옥은 무진사행(1748)의 정사 홍계희의 '일관요고'를 휴대하고 일본으로 떠났다. 그리고 서기 성대중은 신유한의 '해유록'을 모본으로 삼아 '일본록'을 저술했다.
지금까지 진행된 계미사행 연구에서 성대중의 '일본록'은 다른 문사들의 기록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아왔다. 그 주된 이유는 사행 기간에 비해 사행록의 분량이 소략한 데다가 '일본록'의 2책을 견문록으로 구성하면서 신유한의 '문견잡록'을 거의 그대로 수록했기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일본록'과 '해유록'의 저술 방법이나 형식을 비교해 보면 성대중이 신유한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실제 성대중의 집안은 대대로 통신사행에 제술관이나 서기로 참여한 서얼문명가였다는 점과 그의 종조부인 성몽량이 서기로 신유한과 함께 기해사행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신유한과 성대중의 영향 관계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성대중의 '신유한바라기'는 그가 지은 '청성잡기'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성대중은 '청성잡기'에서 신유한의 문학적 역량이 드러나는 다양한 일화-예컨대 삼연(三淵) 김창흡이 그의 문장을 사랑하여 시를 지어 칭찬한-를 제시하며 신유한을 한 세대를 풍미한 최고의 시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정은영 부산대·동의대 교양교육원 강사
※공동기획: 부산문화재단, 조선통신사학회, 국제신문
※협찬: 한국수력원자력(주)고리원자력본부, YK Steel(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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