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것은 소중한 것이다'. 그러나 박제 속에 갇힌 옛것은 안 된다. 과거의 소중한 것들이 현대에 계승 발전되고, 미래 세계에 이어가야 한다.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옛것에 토대를 두되 그것을 변화시킬 줄 알고 새것을 만들어 가면서 근본을 잃지 않으면 더 좋다. 조선 시대 판옥선과 초가집, 궁궐 가마, 상여, 디딜방아를 비롯해 전국 유명 박물관이나 민속촌의 민속 물품들과 역사 드라마에 필요한 역사적인 소품 등을 연구와 고증까지 거쳐 직접 제작하는 민속학자가 부산의 옛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는 이야기를 풀어낸다.
법고창신(法古創新)은 우리나라에서 만든 성어이다. '열하일기'로 잘 알려진 북학파의 연암 박지원(1737-1805)이 한 말이며 출전은 연암집 권 1 초정집서(楚亭集序)이다.
이 뜻에 동조하는 이가 있다. 서양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가 그랬다. 옛것을 아는 것은 당연하고 그것에 창조를 더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나라 장영실도 시대는 달라도 법고창신 정신의 원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영실은 세종 재위 기간 간의대(簡儀臺)를 비롯한 천문기구 여러 점, 앙부일구(仰釜日晷), 현주일구(懸珠日晷) 등의 해시계, 자격루(自擊漏·사진)와 옥루(玉漏) 등의 물시계 등을 속속 개발했다. 일련의 발명품이 탄생하게 된 고민의 이면에는 정확한 시간을 백성에게 알리고자 하는 열망이 존재한다. 정확한 시간을 알린다는 것은 왕도정치 사상과 부합했다. 제왕이 하늘의 뜻, 즉 천체를 관측하여 백성에 농시(農時)를 하사하는 일을 관상수시(觀象授時)라고 불렀다. 당시까지 중국에서 고안된 천문대를 썼으며, 해마다 중국 황제에게 가서 달력을 받아 포고했다. 간의대는 우리나라 실정에 맞게 고안된 최초의 천문기구였으며, 이를 통해 조선의 독자적인 시간과 공간이 창조됐다. 간의대가 우리 고유의 책력을 탄생시켰다면, 앙부일구는 동서양을 통틀어 궁중의 전유물이었던 시간을 백성에 돌려준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장영실이 앙부일구를 제작하자 세종은 백성이 다 볼 수 있는 종묘 거리에 이 해시계를 설치하도록 했다. 이로써 조선의 백성은 서양보다 몇 세기나 앞서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있게 되었고 과학의 대중화와 선진화도 이루어 졌다.
장영실의 발명품 중에서 가장 돋보이는 작품은 바로 자격루다. 자격루라는 명칭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자동으로 종, 북, 징을 움직여 시간을 알려주는 물시계이다. 물시계는 기상의 변천과 관계없이 시간을 잴 수 있다는 점에서 해시계보다 더 안정적인 모델이다.
자격루가 세계 최초의 자동 물시계는 아니며 그 한계는 세계 여러 나라 학자들이 절감하고 있었다. 11세기에는 송나라 과학자 소송이 물레방아를 이용했으며, 12~13세기에는 아랍의 과학자 알 자자리가 쇠공을 이용한 자동 시보장치를 개발했다. 장영실이 진정 뛰어난 점은 이러한 연구 성과들을 집대성해 이를 접목하면서도 더욱 뛰어난 장치를 만들었다는 데 있다.
부산에는 부산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많다. 영화의전당, 광안대교, 앞으로 지을 오페라하우스 등이 있다. 영화의 탄생이 뤼미에르 형제에 의한 1895년이고 오페라의 기원은 1597년으로 보고 있다. 이의 문화 원류는 외국문물이라는 것이다. 우리 것에 관한 관심이 뒤처진 상태에서 부산에 세워진 이것들에 의해 우리의 눈이 평소와 달리하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시대 뉴욕의 '자유 여신상', 파리의 '에펠탑', 이집트의 '피라미드', 중국의 '만리장성' 등은 밤낮없이 세계인을 대상으로 손짓하고 있다. 세계인은 그곳에 간다. 하지만 영화의전당이나 광안대교나 새로 생길 오페라하우스 때문에 세계인이 밤낮으로 한국에 오기에는 미약하다. 1000년이 지난 신라의 다보탑이 있어도 세계인이 찾아오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의 전통·민속에 관련된 문화 상징물이 부산에도 필요하겠다. 우리의 눈을 달리하게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통·민속이 담기면서도 세계인이 한국을 찾아올 수 있는 것이 있어야 한다.
자격루를 상징물로 하자. 특별하고 크게 만들자. 영속적이고 영국의 '런던아이'보다 100배 크게 만들자. 그 만드는 기간이 10년이든 20년이든 상관없다. 땅과 하늘과 바닷속으로 도는 캡슐이 달린 물레방아처럼 약간 변형된 그런 자격루도 좋다. 자격루를 만든 장영실은 부산이 탄생시킨 위대한 과학자가 아닌가.
권민수 한국민속문화원 이사장
-약력
▶부경대 사학과(민속학) 박사 과정 수료
▶외교통상부 전문가 자문위원, 부산시축제평가위원 등 역임
▶부산경상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