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지난 23일 황지우(맨 오른쪽) 시인이 전남 담양 창평고택에서 본지 문학기행 참가자들에게 자신의 시 세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 눈 덮인 소쇄원, 눈처럼 맑고 깨끗
- "대숲은 속세의 것을 거르는 필터"
- 과거 제월당·광풍각서 기거하며
- 정자·선비문화 통해 깨달음 얻어
- "시라는 것도 결국 작은 것을 통해
- 세계를 예민하고 넓게 보는 작업"
지난 23일 황지우 시인과 함께하는 전남 담양 문학기행에는 함박눈이 동행했다. 제2의 고향을 찾은 황 시인은 "멀리서 온 독자를 위해 하늘의 소품(눈)이 준비된 것 같다"고 말했다. 황 시인은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냈다. 서울에서 대학과 대학원에 다니다가 담양으로 낙향해 명옥헌 옆에 집필실을 짓고 1988년부터 8년간 살았다. 문학기행 참가자들은 황 시인이 추천한 암뽕 순대국밥(점심)과 대통 밥, 죽순회(저녁)를 먹으며 문학과 별미, 함박눈 등 세 가지 즐거움을 한꺼번에 누렸다. 암뽕순대란 돼지 막창에 26가지 재료를 넣어서 만든 수제 순대다. 황 시인은 "내년 봄 오랜만에 시집이 나올 예정"이라며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비워야 넓어진다
| |  |
| 소쇄원 대밭 앞에 선 황 시인. |
유홍준 교수의 스테디셀러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통해 널리 알려진 소쇄원(瀟灑園)은 자연과 어우러진 우리나라 정원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눈 덮인 소쇄원은 이름 그대로 눈처럼 맑고 깨끗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대숲이 흰 눈을 배경으로 더욱 푸르게 보였다. 황 시인은 "대숲은 속세의 것을 거르는 필터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소쇄원은 서경과 서경이 합일되는 올곧은 선비의 정원이라는 아우라가 느껴졌다.
황 시인은 소쇄원의 비 갠 하늘의 상쾌한 달이라는 뜻의 제월당(霽月堂)과 '비 갠 뒤 해가 뜨며 부는 청량한 바람'이라는 의미의 광풍각(光風閣)에서 기거하며 인생과 문학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소쇄원 정자문화와 선비문화의 가르침을 통해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반성하게 됐다는 얘기다.
"소쇄원의 반 평도 안 되는 좁은 공간에서 옛 선비들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깨달았어요. 저와 제 주위 사람들은 아파트 평수를 자꾸 넓혀가려고 해요. 자기 영역을 넓히고, 키우는 삶의 방식을 추구해왔어요. 이렇게 되면 반대로 세상이 좁아지죠. 겨우 내 한 몸 뉘일 만한 한옥에서 나를 작게 하고, 버릴수록 세상이 넓어진다는 이치를 깨달았어요." 황 시인은 "옛 선조의 문학 작품을 보면 자기를 죽이니까 조그마한 시냇물이 중국의 거대한 동정호 수준으로 그려지는 등 세계가 넓어진다"고 설명했다.
소쇄원이 가르쳐준 '비움의 미학'은 문학으로 이어진다. "시라는 것도 결국 작은 것을 통해 세계를 예민하고, 넓게 보는 작업이에요."
송강 정철, 면앙정 송순 같은 옛 선비는 이런 '비움의 미학'을 삶과 문학 속에서 실천했다고 한다. '십 년을 경영하여 초가삼간 지어내니/나 한 칸 달 한 칸에 청풍 한 칸 맡겨두고/강산은 들여 놓을 데가 없으니 둘러두고 보리다.' 안빈낙도의 삶을 실천하는 면앙정 송순의 가사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황 시인은 "작가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독자에게 외면받을 수밖에 없다"며 "사람이 방에 갇혀 혼자라고 생각하면 외롭고 쓸쓸하지만, 깨고 나오면 나무 새 구름 같은 자연과 세계와 만나고 소통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양극단 속 사잇길(겹)을 찾아서
황 시인은 1980년대라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모더니스트와 리얼리스트, 착지와 초월 같은 양극단 사이에서 자기만의 길을 묵묵히 걸었다. 시인의 친구인 이인성 소설가는 시집 '어느 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발문에서 "시인은 양극단의 혼융, 즉 '겹'을 만드는 사잇길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사막 속 낙타'의 길"이라고 했다. 낙타의 걸음은 없는 길을 초월의 꿈에 의지해 걸어가야 하므로 고통스럽다.
진형준 문학평론가는 "더러운 세상에서 깨끗할 수 있기를 꿈꾸는 것은 환상일 뿐이라는 인식론적 깨달음과 더럽다고 할지라도 버리고 떠날 수 없다는 당위적 깨달음이 맞물려 있다"고 분석한다.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은 사랑하는 사람, 민주, 자유, 평화, 희망을 초조하게 기다리지만은 않고, 나름대로 다가가려는 시인의 고민과 의지가 잘 드러난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이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전문)
# 황지우 시인의 '형태파괴 시'
- 폭압시대 대항한 산물, 훼손된 삶의 거울이자 지배 이데올로기 교란
'여기는 초토입니다//그 우에서 무얼 하겠습니까//파리는 파리 목숨입니다//이제 울음 소리도 없습니다//파리 여러분!//이 향기 속의 살기에 유의하시압!'('에프킬라를 뿌리며')
황지우 시인의 초기 시를 보면 '형태파괴 시'가 많다. 첫 시집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1983)는 신문의 일기예보, 해외토픽, 전보, 광고문안, 공소장, 예비군 통지서, 만화에도 시적 긴장을 부여한다. 격렬한 풍자와 야유, 질타와 저주, 그리고 환멸, 냉소, 자기연민을 담았다.
광주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상처 입은 황 시인의 폭압의 시대에 대항한 치열한 응전 전략의 산물이다. 시인은 형태파괴 시로 현실의 최전선에 복무한 셈이다.
장석주 문학평론가는 "황 시인의 시가 보여주는 형태파괴 시는 기존 시 형식에 길들여진 우리의 의식을 불편하게 하는 '낯설게 하기'를 통해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현실의 모든 것을 의혹의 눈으로 바라보게 하고, 반성하게 하는 효과를 창출한다"고 설명한다.
황 시인은 기자에게 "형태파괴 시'는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했다. 황 시인은 '문화과 사회' 1992년 겨울호 '끔찍한 모더니티'에서 "형태파괴전략은 훼손된 삶의 거울이고,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교란이었으며, 검열의 장벽 너머로 메시지를 보내는 수화(手話)의 문법"이라고 밝혔다.
▶황지우 시인은
- 1952년 전남 해남 출생
- 서울대 미학과 졸업, 서강대 철학석사, 홍익대 미학박사과정 수료
-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연혁(沿革)' 등단
-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교수
- 현대문학상, 김수영문학상, 소월시문학상 수상
- 저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게 눈 속의 연꽃', '어느 날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