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수'는 한국 국정 교과서에서 가장 흔하게 등장해 왔던 익숙한 이름이다. 대한민국 의무교육의 시작인 초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서부터 고등학교 수학 미적분 응용 문제에까지 만만한 이름이 철수였다. 요즘은 '민수'나 '지혜' 등에게 자리를 내줬지만, 현재 한국 성인들 대부분은 영희의 친구 철수와 함께 학창시절을 보냈다. 실제로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이름 중에 철수가 얼마만큼 분포하는지와 상관없이 가장 '보편적'인 이름으로 통용된다.
그저 평범하고, 특별한 재주도 없고, 든든한 배경이 있는 것도 아닌 흔하디흔한 복수의 청년들을 일컫는 대표 단수(?)로 철수는, 그래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친숙한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철수를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 철수 사용 설명서가 서점가에 나타났다. 21세기 '철수'는 '평범함'이 '무능함'으로, '보통'이 '루저'로 취급받는 시대에 살고 있다. 토익 점수 480점 지방 국립대 출신 29세 청년, 철수. 그는 졸업 후 1년째 이력서를 넣을 때마다 번번이 서류 전형에서 떨어지고, 연애나 가족관계에서도 되는 일없이 자꾸 꼬이기만 한다. 짧지만 스물 아홉 평생이 늘 그러했다. 그럴 때마다 늘 자신이 하자 혹은 오류가 발생한 불량품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쩌면 자신이 불량품이 아니라 상대들이 철수가 가진 기능을 제대로 알지 못했거나 잘못 사용한 탓은 아닌지 의문을 가진다. 그래서 사용설명서를 쓰기로 한다. 자신과 관계 맺어온 사람과 세상을 향해 자신을 설명하기로 한 것. 그런데 그 설명을 하필 '전자제품 사용설명서 양식'에 맞춰 풀어 간다.
"준비하기 : 사용하기 전에/ 제품 규격 및 사양, 사용하기 : 취업모드/ 학습모드/ 연애모드/ 가족모드, 관리하기 : 설치방법/ 전원공급/ 청소방법, 주의하기 : 주의사항/애프터서비스를 요청하기 전에/ 소비자피해보상 기준 안내/ 제품 보증서."
이 순서는 소설의 차례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차례를 따라 철수의 취업, 학습, 연애, 가족, 결혼 등 일상과 관계를 풀어가면서 중간중간 철수라는 전자제품의 사용설명서를 삽입했다. 이 작품은 도대체 감정이입의 여지를 두지 않는다. 인물들의 감정과 관계를 풀어가는 장면에서도 마치 제품들 간 기능의 호환과 충돌을 다루듯 언어를 구사하는 데다, 도표로 된 사용설명서를 삽입해 한 치의 감정적 개입도 허락지 않는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하고 우울감이 몰려온다. 그러다, 가슴 한편으로 아릿한 통증이 느껴지고 끝내 긴 한숨을 토해내게 된다.
작가 전석순은 1983년생이다. 철수와 같은 또래다. 그래서 일까. 작가는 우리들에게 자신들이 발딛고 있는 현실을 또렷이 각성시키고 싶었던 것일까. 아프다. 그래서 바란다. 사용되기 위한 설명서를 쓰고 있을 게 아니라 사용 환경을 바꾸길. 청년백수 100만 시대를 살아가는 이 시대의 철수들이 함께 어깨 걸면 가능하지 않을까. 철수가 사용설명서를 끝내면서 누구에게 보여줘야 할까를 고민하다 문득 깨닫는다. 철수 사용 설명서를 쓸 수 있는 사람도, 그걸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사람도 결국은 철수라는 것을.
연극연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