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마지막 비상구-안락사를 말하다(데릭 험프리 지음·김종연 김설아 옮김)'라는 번역본이 출간돼 화제가 됐었다. 현역 의사(영남대 의대)인 김종연 씨가 번역한 이 책은 1992년 미국에서 초판이 나왔는데 당시 뉴욕타임즈에서 18주 연속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를만큼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이 책의 주제는 소극적 안락사, 바로 존엄사(尊嚴死)였다. 이 책이 국내에 번역돼 소개된 지 1년이 조금 더 흐른 지금, 우리 사회는 존엄사 논쟁에 휩싸이고 있다. 지난 11월 국내에서 처음으로 내려진 '존엄사' 인정 판결에 대해 병원 측이 상고하기로 결정해 논쟁에 불을 지폈다.
그동안 법조계에서는 1심법원이 존엄사를 인정한데 대해 진일보한 판결이었다고 평했고 이에 대해 다양한 의견들이 개진됐다. 그 중에는 아직 한국사회가 존엄사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다는 지적도 있었다.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기 전에 법원이 앞서 나갔다는 얘기다. '마지막…'란 책이 16년 전에 출간된 사실이 시사하듯이 외국 몇몇 나라에서는 존엄사가 죽음(삶)의 한 양식으로 꽤 구체화되어 있다.
'마지막…'의 지은이 데릭 험프리가 살아온 길을 더듬어 보면 서구에서 존엄사를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단계에 와있는지를 잘 알게된다. 언론인 출신인 그는 1980년, 합법적인 존엄사에 대한 권리 옹호를 추구하는 전미 헴록협회(Hemlock Society)를 창립했다. 험프리는 '안락사 연구안내기관' '죽음에 대한 권리협회 세계연합' 등 관련 단체를 이끌면서 말기의 암 환자나 회복되지 않고 시간만 끌고 있는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 극심한 통증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성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험프리처럼 존엄사 옹호 활동을 공개적으로 펼치는 이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존엄사에 대한 기본 인식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사실 존엄사는 우리 사회에서 이미 묵인되고 있다. 대한내과과학회지 2008에 따르면 일부 국내 대학병원들은 '소생술 거부(DNR·Do Not Resusctate) 제도'를 운영 중이다. 환자가 위독한 상태에 도달했을 때 인공호흡기를 부착하는 등 생명 연장 의료술을 일절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문서화해 환자 가족에게 서약을 받아놓는 제도다. 서울 아산병원은 2001년부터 이 제도를 시행해 매년 150~200여명의 환자들이 보다 덜 고통스럽게 죽음을 맞이했다.
외국에서는 존엄사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진척된 상태다. 심지어 네덜란드에서는 적극적 안락사가 허용되고 있다. 의사가 치사량의 약물을 투여해 죽음에 이르게 하는 방법으로 다른 나라에서는 엄연한 불법이다. 1996년 미국 고등법원 두 곳에서는 타인으로부터 치사량의 약물을 건네받아 본인이 삼킴으로써 목숨을 끊는 조력 안락사를 옹호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런 상황은 2005년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한 칠레 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의 영화 '시 인사이드'에 나오는 주인공 라몬 삼페드로의 경우가 그렇다.
생명은 최우선 가치를 지닌다는 천부인권에 대해 인간은 본인의지로 죽음을 선택하고 아름답게 죽을 수 있다는 존엄사의 논리에 대해 우리 사회가 숙고할 시점에 닿은 것 같다. 초유의 경제 위기를 당해 먹고 사는 문제가 난감해졌더라도 면제받지 못할 과제가 우리 앞에 놓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