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시선을 존중해야 할 때가 있다. 자기 스스로가 판 동굴에 갇혀 보지 못하는 진실을 타인이 발견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인 1996년, 한국역사를 전공한 한 미국학자가 펴낸 영문판 책 한 권이 국내 한국사학자들을 긴장시켰다. 제임스 버나드 팔레(1934~2006) 전 워싱턴대 교수가 출간한 'Confucian Statecraft and Korean Institutions(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팔레가 응시했던 이는 조선 후기 실학자였던 반계(磻溪) 유형원(1622~1673)이었다. 유형원은 조선 후기의 정치 경제 사회부문에서 진행된 제도개혁을 분석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펴냈고 팔레는 철저하게 이 책을 이방인의 시선으로 해부했다. 최근 이 책은 '유교적 경세론과 조선의 제도들 1, 2-유형원과 조선 후기'(제임스 B. 팔레 지음· 김범 옮김·산처럼)'로 국역돼 다시 논쟁의 도마에 올랐다.
잘 알려졌다시피, 팔레는 한국학을 개척하고 발전시킨 대표적인 학자다. 그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집필한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교수를 비롯해 존 던컨 교수(UCLA), 마이클 로빈슨(인디애나대) 교수, 카터 에커트(하버드대) 교수, 클락 소렌슨(워싱튼 주립대) 교수, 한홍구(성공회대) 교수 등을 제자로 길러낸 한국학의 대부. 그런 팔레가 출간한 'Confucian Statecraft…'은 그동안 한국역사학계가 주창해온 학설과는 사뭇 다른 주장을 담고 있어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가령, 11~18세기 중반 고려~조선은 전체 인구의 30%가 노비로 구성된 노예제 사회였다, 조선 후기의 자본주의 발전이 한국 근대화와 연결됐다('내재적 발전론')는, 한국학계의 주장을 부정하는 그의 견해는 지금까지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를 다스린 사상 즉, 유교적 경세론(經世論)에 대한 팔레의 시각은 한국학계의 그것과는 상당한 각도로 비켜났다. 실학은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것처럼 전통 유학에서 벗어나 근대·민족의식으로 무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과거를 지향한다고 팔레는 역설했다. 불편스러운 타자의 시선이었다.
팔레는 결론에서 더욱 도발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조선 경세 사상의 중심은 중국 고대 제도에 머물러 있었고, … 조선의 안전을 유지한 중요한 버팀목은 1894년 청일전쟁까지 청이 제공한 보호였다. 이것은 근대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에게는 해외 문화에 복종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우울한 요소이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이 한반도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사의 대부분보다 훨씬 복잡하고 수준 높은 문명이 지배한 좀 더 넓은 세계에서 인정받고 참여했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팔레의 이 책은 논란의 중심에 서있는 문제작으로 앞으로 국내외 한국사 전공자들의 검증과 평가를 거쳐 최종 판결을 받을 것이니 지금 잘잘못을 논하는 건 성급한 처사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이 한 권의 책이 비판과 연구의 역사가 일천한 우리 학계에 시사하는 바다. 한반도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낙향 학자였던 반계를 그 당시의 눈으로 보려고 했던 미국학자 팔레. 그의 합리적이고 균형잡힌 시선이 역작을 펴내게 했고 12년이 지난 뒤 이에 자극받은 한 젊은 한국인 사학자가 번역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자가 가야 할 정도(正道)와 그 걸음걸이가 어떠해야 할지를 이 책은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