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악기를 배우는 게 아니다.
지금 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장단을 익혀야 몸을 쓸 수 있다.
그러려면 우선 호흡이 돼야 해.
숨 쉰다고 다 호흡이 아니다.
마음과 정신을 바르게 해야 호흡이 된다.
모두들, 잡념을 털어 내라.
# 아침 7시
연극 연출가 심문섭(33) 씨는 오늘도 자명종소리에 눈을 떴다. 부산 남구 용호동 이기대 끝자락에 들어앉은 도시타워의 심 씨 집은 아침이지만 적막하다. 혼자 산지 벌써 5년째다. 늘상 그렇듯 우유에 곡물을 간 생식을 말아 입에 부어넣듯 마시고 집을 나선다.
감전동에 있는 굿패 '영산마루'에 도착한 것은 정각 8시. 극단 단원 8명과 영산마루 훈련장 김재홍 씨가 몸을 풀고 있다. 오는 4월 부산연극제에 출품할 '신부, 나비 꿈꾸다'를 위한 기초 훈련이다. 전통혼례를 소재로 한 이 작품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해선 배우들이 우리 장단을 몸에 익혀야 한다. 오늘은 덧배기 장단(자진모리)을 치고 있다. 오늘 따라 장구를 멘 배우A 씨의 몸이 굳어 있다. "너 어제 많이 마셨구나. 얼굴에 잡념이 가득하다. 사생활의 찌꺼기를 무대에 뭍혀 오지 마라. 그리고 너, 술 자제해." 심 씨의 야단에 A 씨를 비롯한 단원들이 긴장한다. 심 씨는 이 참에 오금을 박아야 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악기를 배우는 게 아니다. 지금 몸을 만들고 있는 중이다. 장단을 익혀야 몸을 쓸 수 있다. 그러려면 우선 호흡이 돼야 해. 숨 쉰다고 다 호흡이 아니다. 마음과 정신을 바르게 해야 호흡이 된다. 모두들, 잡념을 털어 내라. 자, 10분 쉬고 다시 합시다."
세 시간의 연습을 마치고 심 씨는 배우 4명과 함께 광안리 극단 동녘으로 향한다. 오후에는 다음달 무대에 올리는 '하녀들-for man' 연습이 있다. 광안맨션 옆의 중국집 지하에 있는 극단 사무실은 좁고 어둡지만 20명 가까운 동녘 식구들의 소중한 둥지이다. 심 씨는 대학 한 해 후배인 동녘대표 박용헌 씨와 '하녀들' 포스터 디자인을 체크하고, 동녘의 숙원인 전용극장 개관에 대해 논의한다. 심 씨와 박 대표는 연극협회 김동석 회장에게 자문을 구해보자며 전화를 걸었다. 김 회장은 흔쾌히 시간을 내준단다. 내일 밤 11시에 남천동 해변시장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정했다.
심 씨와 박 대표가 일정을 논의하는 사이 단원들이 점심을 했다. 반찬은 김치와 김이면 족하다. 오늘은 참치 통조림과 계란후라이가 곁들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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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바리데기' 연출자 심문섭 씨가 저승할미로 출연하는 전오미 씨의 연기를 지도하고 있다. 박수현 기자 parksh@kookje.co.kr |
# 오후 1시
'하녀들-for man' 연습이다. 10년차 고참 단원인 박지현과 극단 막내 기수인 장기훈 박훈영이 연습실에 앉아 몸을 푼다. 그런데 장기훈과 박훈영이 점심 먹을 때부터 왠지 풀이 죽어 있다. "너희들, 왜 그래?" "…"
"좋다, 자 오늘 우리 목욕하러 가자." 심 씨는 단원 세 명을 데리고 민락동 수변공원 해수탕으로 간다. 후배단원들의 얼굴이 좀 펴지는 것을 보며 심 씨는 이러길 잘했다고 혼자 생각한다. 1시간30분가량 목욕으로 기분을 푼 이들은 해변을 거니는 모처럼의 여유를 가졌다. 매일 지하 연습실에서 연극과 씨름한 이들에게 오늘은 '환상적인 일탈'이다. 단원들이 광안대교와 바다를 바라보며 담소를 나누는 동안 심 씨도 어느덧 상념에 잠긴다.
대학 2년 때였다. 학기말 워크숍 공연으로 연출한 '맥베드'를 객석에서 보았다. 그런데 심 씨는 졸고 말았다. 자신이 연출한 연극이 너무 재미가 없었던 것이다. 심 씨는 그때 연극을 집어치워야 겠다고 생각했다. 이듬해 봄 심 씨는 동료 오치운과 함께 프랑스 '아비뇽연극제'로 날아갔다. '그만둘 때 그만두더라도 좋은 연극을 실컷 보고 그만두자'고 오치운과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경비 300만 원은 어머니에게 '대학에서 연수갑니다, 다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거짓말을 해서 타냈다. 심, 오씨는 보름 동안 한풀이하듯 연극을 관람했다. 그런데 세계적인 작품이라는 연극들이 하나 같이 재미가 없었다. 여기서 위안을 받은 심 씨는 다시 결심했다. '재미있는 연극을 만들어보자'.
모처럼 목욕과 해변 산책으로 기분을 푼 심 씨와 단원들이 아쉬운 기분을 추스려 극단으로 돌아온 시각은 오후 4시. 이들은 기운을 내 6시까지 집중 훈련에 들어갔다. 극단에서 저녁을 간단히 지어먹고 나자 '바리데기 B팀'이 연습하러 왔다. 심 씨는 A팀에 비해 우리 장단과 춤을 강조했다.
# 저녁 7시
심 씨는 '바리데기'가 앙코르 공연되고 있는 중구 광복동 가마골 소극장으로 향한다. 오늘 모 방송사의 인터뷰가 잡혀 있다. 이 작품은 지난 6개월 동안 8회에 걸쳐 앙코르에 앙코르를 거듭하며 연출가 심 씨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 놓은 연극이다. 지난해 7월 경성대 지하철 역에서 첫 판을 벌인 이 공연은 그해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젊은 연출가전에 참가해 2등상인 '앙상블연극상'을 받았다. 이어 8월 거창연극제와 9월 '2006 6대 광역시 및 제주도 예술교류전', 서울아트마켓 등에 잇따라 초청되었다.
지난 5일부터 앙코르 무대를 갖고 있는 가마골 소극장은 이날도 120석의 객석이 모두 찼다. 부모에게 버려졌지만 나중에 부모를 살리기 위해 스스로 지옥까지 간다는 바리데기의 설화를 모티프로 한 이 작품은 우리의 연희형식에 현대감각을 입혀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었다. 공연이 끝나자 인터뷰가 시작됐다.
"'바리데기'가 관객을 끄는 힘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우리의 전통 연희 형식에다 우리의 정서를 녹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는 눈물과 웃음이 있는 재미있는 연극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삭막한 현대인들의 가슴을 따뜻하게 적셔주는 놀이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재미있는 연극이란 어떤 것인가?"
"재미있는 연극이 되려면 '잘 보이고, 잘 들려야' 합니다. 제가 추구하는 재미있는 연극은 상업주의나 대중추수주의가 아니라 '잘 보이고 잘 들리는' 작품입니다. 제가 지지난해 만든 '엘리베이터'(육체적 상황극) 같은 실험연극도 어디까지나 잘 보이고 잘 들리는 방법을 찾아내는 실험입니다."
"2005년 APEC 축전공연으로 연출한 록뮤지컬 '가락국기'와 2002년에 만든 '가락국기' 그리고 '오레스테스 죽이기' 등 주목받은 작품들이 모두 신화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신화에 천착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신화가 문학예술의 보고인 것은 그곳에 인간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저는 신화를 소재로 인간을 탐구하고 싶습니다." 심 씨의 '연극론'은 단순하면서도 심장한 의미를 던져주었다. 인터뷰를 마친 심 씨는 곧바로 극단으로 돌아왔다. 하녀들-for man' 마담 역의 고인범 씨가 연습하고 있다. 심 씨는 고 씨에게 "마담의 성격은 나이가 80이 되더라도 처녀이며, 하녀들을 배려해서는 안되고, 폭군처럼 군림해야 한다"고 캐릭터를 설명해 준다.
'하녀들-for man' 연습은 11시가 넘어서야 마무리됐다. 사무실에 데스크톱 모니터에는 서울에 사는 '신부, 나비 꿈꾸다'의 작가 정재영 씨가 메신저에 들어와 있다. 텍스트를 조금 수정해 장모와 신랑의 갈등 부분을 흥겨운 분위기로 만들기로 합의했다. 벌써 자정이 훌쩍 넘었다. 사원들을 위한 연극 제작 요청을 해온 삼성SDI(경남 양산) 방문 등 내일 일정을 박 대표와 체크한 뒤 심 씨는 새벽 1시 귀가했다.
집에 와 보니 '하녀들-for man' 의상을 맡은 황성원 의상디자이너의 의상 사진 자료와 '바리데기' 음악 작곡자 전현미 씨의 음악수정 메일이 와 있다. 내일 극단에서 의논하기로 돼 있으니 오늘 이를 모두 검토해야 한다. 새벽 2시, 심 씨가 잠자리에 들기 전 꼭 하는 일이 있다. 뉴스 검색이다. 정치면도 빼놓지 않는다.
# 새벽 3시
심 씨는 하루의 일정을 마무리하고 마침내 잠을 청한다. 오늘 따라 잠이 금방 오지 않는다. 몇 년 전인가. 연극에 절망했던 때의 일이 떠오른다. "세상은 변하는데 연극은 예전 그대로입니다. 과연 연극을 해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허은(경성대) 교수는 제자의 고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태초에도 연극이 있었고,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연극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너와 꼭 같은 고민을 하면서. 중요한 것은 연극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 나는 지금 연극을 하고 있다." 심 씨는 어느덧 깊은 꿈 속에 빠져들었다.
> > 심문섭 연출가는
▲1974년 경남 합천 출생 ▲경성대 연극영화학과 졸업, 동대학원 석사과정 수료 ▲극단 동녘 입단(1998) ▲연출작 '바리데기' '하녀들' '마왕' '오레스테스 죽이기' '엘리베이터' '가락국기' '록뮤지컬 가락국기' ▲부산연극제 무대기술상(2002), 밀양여름공연예술축제 앙상블연극상(2006) ▲현 극단 동녘 연출가, 경성대 출강, 마산시립합창단 연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