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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천천을 거닐고 있는 구모룡 교수. 서순룡 기자 seosy@kookje.co.kr |
이번에도 어김없이 새해가 밝았다. 사람들은 이맘 때면 새로운 생활, 새로운 삶을 꿈꾼다.
새로운 삶은 자신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자각에서 비롯된다. 21세기도 6년이 훌쩍 지난 지금 바야흐로 인류도 근대적 양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나침반으로서의 새로운 세계관이 필요한 시점이다. '신생(新生)'의 시학, 신생의 문학을 탐구하고 있는 문학평론가 구모룡(48·한국해양대학교 동아시아학과) 교수를 지난 3일 만나 '신생'을 물었다.
구교수와 국제문화센터 2층 전통찻집에서 차를 마시며 새해 인사를 나누다 올해 유난히 '돈 많이 버세요' '부자되세요'가 유행한다는 느낌이 들어 어떤 현상이냐고 물어보았다.
"제가 올해 황금돼지띠로 부자될 운이랍니다."(물론 띠는 음력 1월1일부터 적용된다) 웃으며 운을 뗀 구 교수는 말을 이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 인사엔 '돈'이나 '부자'란 단어가 없었습니다. 중국의 새해 인사가 '부자되시라'죠. 아마 IMF 이후 형성된 경제제일주의와 무한경쟁 풍조 속에서 사람들의 경제적 안정에 대한 열망이 인사나 덕담으로까지 보편화된 현상이 아닌가 합니다."
구 교수는 "사람들이 삶의 수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높이려는 것은 당연한데, 그 욕망이 유독 경제적인 데만 치중되고 있다는 게 문제"라며 "이는 우리 사회의 건강한 성장을 가로막는 병리현상"이라고 진단했다. 이처럼 경제에 치우친 욕망은 정작 삶의 질에 중요한 환경과 복지보다는 성장에만 목소리를 높이는 결과를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이 우리 사회를 우경화시키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지 않을까 우려된다며 여기에는 일부 정치권이 국가의 미래를 외면하고 눈앞의 당리당략을 위해 악용하는 점도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사람들의 욕망을 경제에만 쏠리게 한', 이른바 신자유주의 물결은 1990년대 들어 흔히 운위되는 '문학의 위기'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게 아닙니까?" 기자의 이 물음에 구 교수는 "문학의 위축을 가져온 것은 분명하며, 주된 흐름도 크게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80년대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문학'이었다면, 90년대 이후에는 '돈이 되는 문학'이 주류를 형성했습니다. 문학도 시장주의의 물결에서 살아남아야 했기 때문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과연 문학이란 무엇이냐'란 물음입니다. 과거에는 '문학은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문학은 재미이다'가 된 겁니다."
"여기에 절망을 느끼고 있다"는 구 교수는 "90년대 이후 '돈이 되는 문학'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다른 흐름도 있다"고 설명했다. "그 하나는 80년대의 '민족'을 확대해 아시아 공통의 문제를 탐구하는 경향입니다. 또다른 하나는 도도한 시장제일주의에 밀려나는 자연·생명·생태, 지역에 관심을 갖는 흐름입니다."
자연·생명·생태, 지역은 구 교수가 천착하고 있는 분야이다. 그는 지난 1999년 이해웅 조성래 이성희 김경복 시인 등과 함께 시전문 계간지 '신생(新生)'을 창간해 지금까지 8년째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또 그가 2000년 펴낸 평론집 '제유의 시학'은 '서정시·주변부·동아시아'를 부제로 달고 있다. 이제 '신생'의 의미를 물을 수 있게 됐다. 우리는 찻집에서 일어나 최근 생태하천으로 변모하고 있는 온천천 산책에 나섰다.
"시전문 계간지 '신생'의 의미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삶을 지향한다'는 포괄적인 개념으로 썼습니다. 근대의 도구적 합리주의가 물질·자본을 중시함으로써 생태환경 파괴, 인간 소외 현상을 낳았습니다.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써 인간과 인간의 화해,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이끌어내어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생'은 이를 지향점으로 활자화된 시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과 자연과 더불어 하는 시운동이며, 나아가 이 같은 새로운 삶을 비추는 사상과 세계관을 찾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구 교수는 설명을 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자연만을 부르짖는 생태근본주의자는 아닙니다. 이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사람을 배제한 반도시주의, 반과학기술주의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보거든요. 인간과 자연의 문제를 동시에 봐야 현대사회의 모순구조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구교수에게 이런 시운동은 새로운 시학과 시론의 연구로 귀착된다. "'새로움의 추구' 혹은 '실험정신'으로 대표되는 근대미학은 자본주의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새로움에 대한 추구야말로 자본주의의 미덕인 대량생산 대량소비를 가능케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기중심주의, 동일성, 은유에 바탕한 근대시학을 비판하고 생명의 시학이자 신생의 시학인 '제유의 시학'을 내세웠다.
"제유의 시학은 단순히 수사법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수사법은 사유의 형태이며 이는 곧 세계관이기 때문입니다." 구 교수는 이처럼 결론을 먼저 말한 뒤 제유의 시학에 대한 설명을 이었다. "제유(提喩)는 부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수사법입니다. 다시 말해 유기적 전체성과 시적 연속성 그리고 생명적 역동성을 해명하는 기본 수사법이 제유입니다. 이에 비해 파편화된 부분과 부분을 기계적으로 연결하는 환유(換喩)나 자아의 과잉 노출과 동일성을 강조하는 은유(隱喩)는 생명과정의 근본 주제들인 전체성과 연속성 그리고 역동성을 설명하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환유와 은유는 근대 기계론적 세계관의 기초를 이루는 수사법인데 비해 제유는 이를 넘어선 유기론적·생태론적 세계관을 이루는 수사법이라는 것이다. 제유를 확장하면 부분인 '나'에 전체인 우주가 담겨 있다는 얘기가 된다. 결국 구 교수는 실험성과 언어에 매몰된 근대시학을 비판하고 '나와 우주가 생명적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전제로 한 '제유의 시학'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나와 우주가 연결되어 있다는 깨달음은 새로운 삶, 즉 '신생'의 기본적인 인식인 것이다.
온천천을 거닐면서 구 교수는 고향 밀양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얘기했다. 중학교 때 부산으로 이사와 살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시 쓰기로 발현되었던 것 같다고. 대학시절 도시화와 함께 농촌의 붕괴 등을 지켜보면서 사회과학적 상상력이 터져나와 2학년 때 문학평론 길로 들어섰다는 그는 "내 문학의 원형은 고향"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신생비평선1로 '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을 펴내기도 한 그는 한 번도 지역이란 주제를 떠나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의 지역주의는 그러나 지역에의 매몰을 뜻하지 않으며, 중앙중심주의와 지역의 한계를 모두 비판하는 것이다.
구 교수는 "문화예술인은 자기만에 매몰돼 일반인과의 소통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며 "사회와 이웃에 관심을 갖는 것이야말로 '신생'의 출발"이라고 말했다.
# 구모룡 교수는
▲1959년 경남 밀양 출생 ▲부산대 국어교육학과, 동대학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평론집 '시의 옹호' '지역문학과 주변부적 시각' '제유의 시학' '앓는 세대의 문학' 등 ▲현 한국해양대학교 동아시아학과 교수, 시전문 계간지 '신생' 편집위원, 부산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부산민예총 부산문화정책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