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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강진 동서대 교수 |
경남 밀양의 아랑 전설을 소재로 한 문헌이 처음 소개된 것은 1843년의 '청구야담'이 아니라 이보다 33년 앞선 1810년 홍직필이 쓴 '매산집'이라는 주장을 펼친 논문이 나와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하강진 동서대 영상매스컴학부 교수는 최근 '지역문학연구' 13호에 발표한 '밀양 영남루 제영시(題詠詩) 연구' 주제의 논문에서 이 같이 밝혔다.
하 교수에 따르면 아랑의 전설은 김경진(1815~1873)의 '청구야담'에 처음 보이는 것이라고 지금까지 알려져 왔으나, 홍직필(1776~1852)이 쓴 '매산집'의 '기영남루사(記嶺南樓事)'에 먼저 나온다는 것이다. 또 '기영남루사'에는 아랑을 소재로 한 시도 이원명(1807~1887)이 1869년에 쓴 '동야휘집'에 실린 것보다 59년 빨리 소개돼 있다고 주장했다. 하 교수는 홍직필이 쓴 아랑 전설은 김경진의 글보다 훨씬 상세하게 묘사돼 있으며, 사건의 핵심 요소인 해결자의 등장과 범인의 색출 과정을 소략하게 재구성했다는 점에서 다소 차이가 있다고 밝혔다.
하 교수는 홍직필이 1810년 9월에 부친의 임소인 밀양에 가서 영남루를 유람했는데, 당시 마을 노인에게서 아랑 이야기를 듣고 '기영남루사'를 썼다는 것이다. 서두, 중간, 종결의 3단 형식으로 구성된 '기영남루사'는 중간 단계의 후반부에 영남루를 배경으로 벌어진 아랑 피살사건의 전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아랑 피살 사건이 해결되고 난 다음에 '영남루월야봉이상사설전생원채(嶺南樓月夜逢李上舍說前生寃債)'의 과시(科詩)가 실시됐다고 적혀 있다는 것이다. 하 교수에 따르면 홍직필은 이 시에 대해 관찰사가 관아의 뜰에서 선비를 선발하거나 부사가 영남루의 뜰에서 백일장을 개최할 때 시제(詩題)로 사용한 것으로 기록했다. 홍직필은 아울러 관아의 서리들이 부사가 새로 부임할 때마다 목욕재계해 아랑이 순절한 장소인 능파각(영남루의 침실)의 기둥 앞에서 음식을 차려 제사를 지냈고, 그가 이곳을 찾은 당시에도 제향의 전통이 있다는 사실도 기록했다는 것이다.
하 교수는 이에 따라 이 시를 지은 작가가 밀양 선비 배극소 혹은 한말의 문사 배익소라는 사실도 무의미해진다고 밝혔다. 배극소는 홍직필이 글을 쓴 이후인 1819년에 태어나 1871년에 사망한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고, 배익소의 존재는 확인할 수 없어 두 사람을 실제 작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들의 생존 시기보다 훨씬 빠른 '매산집'의 '기영남루사'에 동일한 시제가 이미 있는 것을 고려하면, 작가는 가공인물인 배익소나 배극소라 하든지 아니면 미상으로 처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영남루사'에 시제만 언급된 과시가 '동야휘집'에는 36행의 장시 형태인 '영남루월야봉이상사읍(泣)설전생원채'가 배익소의 작품으로 소개돼 있고, 서유영(1801~1874)의 '금계필담'의 아랑 전설(제목없음)에는 그 일부를 적출한 8행의 '영남루추(秋)월야봉이상사설전생원채'가 배극소가 지은 것으로 돼 있다.
하 교수는 "이제 아랑 전설을 소재로 한 글과 시가 기존의 주장보다 훨씬 앞당겨짐에 따라 아랑 소재 시를 지었다는 관련 작가 배익소 혹은 배극소에 대한 문제도 검토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아랑 전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밀양 관아의 아전이 밀양 부사의 딸인 아랑을 욕보이려 하다 항거하자 칼로 찔러 살해하고 대숲에 버렸다. 부사는 아랑이 외간 남자와 내통하다 함께 달아난 것으로 알고 벼슬을 사직했는데, 이 때부터 밀양에서는 신임 부사마다 부임하는 첫날 밤에 의문의 주검으로 발견돼 모두 그 자리를 꺼리게 됐다. 이상사(李上舍)라는 담이 큰 사람이 밀양부사를 자원해 와 부임 첫날 밤에 나타난 아랑의 원혼으로부터 억울한 죽음을 듣고 원한을 풀어주었다. 011-586-28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