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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김지석 씨가 지난 6일 부산 해운대 요트경기장 내 광장을 거닐며 아시아 영화의 공동발전 구상에 잠겨 있다.
강덕철 기자 kangdc@kookje.co.kr |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김지석(46) 씨. 그는 1996년 제1회부터 지난 10월 제11회까지 모두 열 한 번의 영화제를 통해 영화팬들에게는 낯익은 인물이다. 프로그래머는 상영할 영화를 세계 각국에서 골라오는 영화제의 핵심이자 본질적인 업무를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부산국제영화제 창립멤버인 데다 이 영화제가 포커스를 맞추고 있는 아시아 영화를 담당하고 있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세계적인 영화제로 성장한 데는 그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 같은 '부산국제영화제의 심장'이란 외형적인 면에 가려 있는, 그러나 결코 놓쳐서는 안될 김 씨의 중요한 역할이 있다. 그것은 그가 우리에게 '아시아의 대한 새로운 발견'을 제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아시아 순례자이며 아시아 탐험가이다. 그가 '축복 받은 직업'이라 할 수 있는 대학교수 자리마저 버리고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에 전념하는 것은 이 일에 단순한 직업 이상의 가치와 소명의식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6일 김 씨를 만나기 위해 부산 해운대 요트경기장 안에 있는 부산국제영화제 사무국을 찾았다. 그는 내년 2월 총회에 보고할 제11회 부산국제영제 결산과 내년 영화제 계획을 수립하느라 분주했다. 그는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기자는 영화를 담당했던 10년 전인 1996년 그를 처음 만났다.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인 전양준, 부집행위원장 이용관 씨와 함께 영화제를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모습, 특히 그해 3월 홍콩국제영화제 벤치마킹을 갔을 때 현 캐나다 밴쿠버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이자 아시아영화 비평가인 토니 레인즈를 비롯한 각국의 프로그래머 및 영화제 관계자들과 격의없이 대화를 나누는 그의 모습은 퍽 인상적이었다.
부산예술대학에 재직 중이던 당시 그가 펴낸 '아시아영화를 다시 읽는다'(한울)란 책이 생각나 아시아(영화)에 대해 언제부터 관심을 가졌는지 물어보았다.
"한국에는 영화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던 1989년 가을 일본 야마가타 영화제를 참관하러 갔을 때입니다. 그곳에서 아시아 각국의 영화제를 소개한 팸플릿을 보고는 마치 '신천지'를 발견한 듯한 기쁨에 들뜬 기억이 납니다. 게다가 그 팸플릿 중 인도네시아 영화사를 소개한 글에서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인도네시아 영화의 대부로 추앙받고 있는 후융 박사란 사람이 바로 한국인 허영 감독인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허영은 인도네시아의 영화평론지 '아네카'가 그의 죽음을 '인도네시아 영화계의 커다란 손실'이라며 애도할 정도로 인도네시아 영화사에서 중요한 인물. 김 씨는 "그가 일본군 홍보영화를 만들어 조국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지만 파란만장한 삶을 산 한 인간, 조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타국에서 쓸쓸히 병사한 그의 영혼을 위로해주고 싶었다"며 "이것은 아시아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라고 말했다. 김 씨는 허영의 유작 '하늘과 땅 사이' 프린트를 어렵게 찾아내 복원하기도 했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할 작품을 고르기 위해 매달 한 두 차례 외국의 영화제를 참관하고 연간 800여 편의 영화를 본다. 그러나 이것을 '일'이라고 생각하면 고역일 것이다. 그는 그 일에서 매번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경험하며 짜릿한 즐거움을 만끽한다고 말했다.
"'바미안의 석불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수치심 때문에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는 내용의 글을 기억할 지 모르겠습니다. 1998년 이란의 영화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인터넷으로 전 세계 영화인들에게 보냈지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이 바미안 석불을 파괴한다는 데 대해 서방의 언론들이 벌떼같이 들고 일어나 '광신도들의 야만적인 행위' 운운했지요. 마흐말바프는 아프가니스탄에서 한 해 수백 명의 어린이들이 굶어죽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해선 침묵하면서 자신들의 시각에서 석불에 대해 야단을 떠는 서방 언론의 태도를 비판한 것이었습니다. 그 글은 서방언론에 무비판적으로 젖어 있던 내게 새로운 아시아적 시각과 세계관을 열어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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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1회 부산국제영화제 결산 업무로 분주한 프로그래머 김지석 씨가 잠시 포즈를 취했다. |
그는 말을 이었다. "우리는 대학 과정을 지나면서 흔히 미국과 유럽의 서구인들이 아시아를 보는 시각, 혹은 서양의 동양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오리엔탈리즘이 편향된 시각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아시아 영화를 많이 보면서 이론적인 이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를 체감하게 되었습니다. 영화는 제게 세계관을 넓혀주는 구체적인 도구인 셈입니다."
김 씨는 "역시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며 자료실에서 시집을 한 권 가져왔다. 언뜻 고색창연한 고서적 같아보였는데, 제8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린 2003년 발간한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The Wind Will Carry Us)'란 제목의 책이었다. 이 책의 발간 배경도 사연을 들어보니 그의 아시아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란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란 유명한 감독이 있다. 그를 주목해온 김 씨는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는 제목의 작품을 발견하곤, 제목의 내력을 물었다. "지난 67년 32세의 나이로 요절한 여류시인이자 영화감독인 포루흐 파로흐저드의 시 제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녀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자극하는 수작들을 많이 발표한 빼어난 시인이었다. 마흐말바프 감독의 '침묵'이란 영화도 그녀의 시가 모티프이다. 파로흐저드의 유일한 유작인 다큐멘터리 '검은 집'이 있었고, 나세르 사파리만 감독이 파로흐저드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혼의 거울'도 제작되었다. 김 씨는 이를 부산국제영화제에 소개했고, 파로흐저드의 시집을 발간하고 낭송회를 가져 영화팬들에게 깊은 감동의 시간을 제공했다. 영화와 함께 이란 문학을 처음 소개한 의미있는 자리였다.
"이란은 '시의 나라'라고 할 만큼 훌륭한 시인과 좋은 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엔 이란의 시선집 한 권 없더군요. 우리의 서구 문화 편식증은 너무 심한 편입니다. 파로흐저드와의 만남은 저의 아시아 재발견에 대한 투지를 더욱 불태운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시아(영화)의 가치와 매력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김 씨는 "다양성"이라고 말했다. 아시아에는 다양한 문화 종교 예술이 공존하고 있고, 그래서 항상 새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부산국제영화제의 앞날도 이 같은 아시아 문화의 수용 여부와 직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그는 대만의 차이밍량 감독이 지난해 한 말이라며 소개했다. "아시아의 좋은 영화가 한국에서 팔리지 않는다면 아시아 감독들의 작품을 부산국제영화제에 보낼 이유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이는 우리나라 영화팬들이 한국영화와 헐리우드 영화 편식증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인 동시에 부산국제영화제 미래에 대한 경고를 뜻한다고 김 씨는 해석했다.
김 씨는 "이제 '부산국제영화제 발전'은 '영화 문화의 성숙'이란 의미로 외연이 크게 확대되었다"고 말했다. 지난 11년 동안 부산국제영화제를 반석 위에 올려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더욱 그의 역할이 중요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전체의 동반 성장을 모색해야 하며, 또 아시아에서 가장 큰 시장인 한국이 영화 편식증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카데미를 통해 배출한 아시아의 젊은 감독들과 네트워크를 형성해 지속적으로 교류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지난 10년보다 앞으로 10년은 더욱 '뻑시게'일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한 그는 "교수 때보다 생활수준은 절반으로 떨어졌지만 1년에 신작 영화 800편을 볼 수 있는 행운을 가진 사람은 세계에서 몇 되지 않을 것"이라며 웃었다.
김 씨와 작별하고 돌아오는 길에 시집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를 펴들었다. '나의 작은 밤, 아 슬프도다/바람은 나뭇잎과 만나고/나의 작은 밤 황량한 두려움이네/…생명의 모든 것이여/쓰라린 기억의 손을 내 사랑의 손에 두어라/그리고 삶의 뜨거움을 느끼는 너의 입술을 내 사랑의 입술에 보내라/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어둠 속에서 내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 울림을 주는 시편이었다. 이 시집과의 만남은 기자에게도 '아시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 김지석씨 약력
▲1960년 부산 출생 ▲부산대 기계설계과 졸업 ▲중앙대 대학원 석사 과정(영화전공) 졸업 ▲부산예술대 교수(1993~2001) ▲영화비평지 '영화언어' 편집인 ▲저서 '아시아 영화의 이해' '아시아 영화를 다시 읽는다' '홍콩영화의 이해' 등. ▲현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