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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영도대교. 부산시 제공 |
가을비가 흩뿌리던 날, 부산 금정구 회동수원지 인근 오륜동 상수도시설 부지를 찾았다. 가건물과 노지에 거대한 철골들이 쌓여 있었다. 찢어진 방수포 사이로 붉은 녹이 드러났고, 부재 사이에는 잡초가 자랐다. 2011년 해체된 옛 영도다리의 원형 부재들이었다.
두꺼운 강철판에는 어른 주먹보다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쇠가 겹겹이 일어나는 층상 부식도 눈에 띄었다. 상판을 들어 올릴 때 중심축 역할을 하던, 영도다리의 심장 격인 주 회전축과 베어링 하우징은 노지에 부려졌고, 톱니바퀴에는 마른 덩굴과 찢어진 방수포가 엉켜 있었다. 해체된 지 15년, 부산시 지정기념물 제56호인 옛 영도다리 부재가 처한 현실이다.
1934년 개통한 영도다리는 단순한 교통시설이 아니다. 식민지 시기부터 한국전쟁과 산업화까지 부산의 근현대사를 함께 건넌 다리다. 피란수도 부산에서 헤어진 가족을 기다리던 이들의 기억이 쌓인 장소다. 부산이 지켜야 할 것은 다리의 외형만이 아니라 그 시간을 견뎌낸 원형 부재와 거기에 새겨진 도시의 기억이다.
다리는 노후화와 인근 롯데타운 건립에 따른 교통량 증가 등을 이유로 2011년 해체됐다. 당시 부산시 문화재위원회가 해체와 재가설을 승인하면서 내건 조건은 주요 원형 부재를 보존·전시할 전시관 건립이었다. 보존 대상으로 분류된 부재는 101종 191개다. 트러스와 받침보(거더) 끝단에는 식별번호를 매긴 초록색 테이프 꼬리표가 남아 있었다.
롯데 측은 1100억 원을 들여 새 다리를 지어 2013년 기부채납했다. 그러나 전시관 건립비 부담을 둘러싼 부산시와 롯데의 소송은 부산시의 패소로 끝났다. 이후에도 원형 부재를 보존·전시할 대안은 실행되지 않았다.
취재 과정에서 확인한 부산시의 대응은 현장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첫 통화에서 꼬리표의 식별번호에 대응하는 부재 목록과 공개 여부를 묻자 담당자는 “찾아보겠다”며 “있다고 해도 공개하는 것은 다른 문제”라고 했다. 공개할 수 있는지 검토해 알려주겠다고 했지만 연락은 없었다. 일주일 뒤 다시 묻자 머뭇거리다 “있다고 보면 된다”고 답했다. 공개 요구에는 정보공개 신청을 하라고 했다. 관리 부서를 물어도 머뭇거렸다. 도시안전과(옛 도로계획과)가 아니냐고 짚어 묻고서야 “우리가 한다”고 답했다.
관리 주체라면 어떤 목록을 갖고 있으며, 실물이 어떤 상태인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담당자는 관리대장이 있는지 답하지 못했다. 부재의 훼손과 유실 여부를 어떻게 점검하는지에도 설명을 내놓지 못했다.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질문에는 “본 대로 보관하고 있다”고 했다. 가건물과 노지에서 녹슬고 삭아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관리란 말인가. 대책을 묻자 보관소 건립 예산 10억 원을 신청했다며 “다른 계획은 없다”고 했다. 예산을 기다리는 동안에도 부식은 진행된다.
새 영도대교는 지난 10일부터 구동설비 이상 징후로 도개행사를 중단했다. 옛 다리의 부재는 보존 대책을, 새 다리는 점검과 정비를 기다리는 상황이다. 30일 개막하는 제34회 영도다리축제를 앞두고 다리의 상징성과 유지관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축제가 다리의 가치를 알리는 자리라면, 그 역사를 담은 원형 부재도 외면해서는 안 된다.
올해는 부산항 개항 150주년이다. 부산은 해양도시의 역사와 피란수도의 유산을 미래 자산으로 내세운다. 그러나 도시의 역사를 지키는 일은 기념행사와 홍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영도다리 부재의 보존은 이미 15년 전에 한 약속이다. 부산시는 왜 그 보존 약속을 지키지 않는가. 다리의 기능은 새 구조물이 이어받더라도, 옛 구조물의 재료와 제작 흔적은 그 시대를 증언한다. 리벳과 강판, 톱니바퀴와 회전축은 사진이나 모형으로 온전히 대신할 수 없는 기록이다. 전시관의 입지와 재원을 논의하는 사이 실물이 훼손된다면 훗날 전시할 대상부터 잃게 된다.
부산시는 101종 191개 부재 목록을 공개하고 실물과 대조해야 한다. 훼손과 유실 여부를 전수조사하고, 전문가 진단을 거쳐 응급 보존 처리에 착수해야 한다. 점검 결과와 조치 이력을 남길 관리체계도 마련해야 한다. 다리박물관은 그 위에서 입지와 운영 방안, 재원 조달 계획을 다시 세울 일이다. 장기 계획이 당장의 보존을 미루는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
피란민들이 혈육을 기다리던 다리의 뼈대가 이제는 도시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부산이 지켜야 할 것은 축제 때 들어 올리는 상판만이 아니다. 그 다리에 쌓인 시간을 버리지 않겠다는 약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