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부산 정치권에서는 꽤 의미 있는 법안이 발의됐다. 법안명은 ‘원자력안전위원회(원안위)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원안위를 원전으로부터 반지름 30㎞ 이내 지역에 입지하도록 규정하는 것이 개정안의 골자다. 원안위는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국내 원전의 안전 강화와 정책 재정비 등을 위해 2011년 10월 출범한 독립 기관이다. 출범 이후 현재까지 서울에 주소지를 두고 있다.
해당 법안은 당시 부산에 지역구를 뒀던 21대 국회의원 10명 등 총 13명의 의원이 이름을 올릴 정도로 원전도시 부산에 큰 반향과 관심을 일으켰다. 원안위가 원전 소재 지역에 있으면 원전 사고나 이상징후 발생 시 원활하고 신속한 대응이 가능할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졌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도 당시 법안검토 보고서를 통해 “원안위가 원전 소재지로 이전하면 실익이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과방위는 그 근거로 ▷원전 현장에서 원자력 정책 신속 추진 ▷원전 인근 주민과 활발한 소통 ▷원전 사고 발생 시 적기 대응 등의 기대효과를 제시했다.
물론 법안은 21대 국회에서 처리되지 못 한 채 회기 종료로 자동 폐기됐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법안 제정 필요성은 꾸준히 제기됐다. 매년 진행된 원안위 대상 국정감사에서는 이 문제가 단골 이슈로 등장했고 지역 사회에서는 ‘원안위가 원전 소재 지역에서 원전 안전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지속적으로 제기됐다. 하지만 그때마다 원안위는 원전 소재지로의 이전 불가 방침을 고수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서울을 떠나면 안 된다’였다.
원안위가 밝힌 이전 불가 사유는 이렇다. 우선 원전을 제외한 방사선 관련 시설·기관의 상당수가 수도권에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원안위가 ‘원자력발전’ 1개 분야의 업무만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방사선’ 전반을 관할하기 때문에 부산 이전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게 당시 원안위 주장의 핵심이었다. 이 밖에 ▷원전 소재지에 이미 원안위 지역사무소 설치 ▷특정 원전 주변에 원안위가 위치하면 정치적인 논쟁이나 지역 갈등이 발생할 우려 등을 이유로 원전 소재지 이전을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원안위는 과거 자신들이 ‘탈서울’에 그토록 반대하며 목소리를 높였던 것과 달리 최근 세종 이전이 확정된 이후에는 침묵을 지킨다. 앞서 정부는 지난 13일 2차 중앙행정기관 이전 세부계획을 발표했다. 수도권에 있는 중앙행정기관(부처) 등 44곳을 2027년부터 2031년까지 세종으로 순차 이전시키는 내용이다. 여기에는 원안위가 포함됐다. 그런데 원안위는 10월 말까지도 어떠한 반대 목소리나 입장을 내놓지 않고 있다. 원안위가 부산을 비롯한 원전 지역 이전을 반대하며 서울 잔류를 고수한 이유대로라면 이번 ‘세종행’에도 대놓고 반대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맞다.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찾아봐도 세종시에는 원전이나 방사선 관련 시설이 부산·서울보다 많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원안위는 시민단체로부터 ‘규제 기관이 원자력 진흥기관으로 전락했다’는 비판까지 받는다. 지난해 11월 고리원전 2호기의 수명을 연장한 데 이어 지난 27일에도 고리 3, 4호기의 계속운전(수명 연장) 허가안을 의결한 데 따른 비판이다. 환경·탈핵 관련 일부 시민단체는 최원호 원안위원장의 사퇴까지 촉구하는 상황이다. 물론 이들 단체의 비판이나 주장이 전적으로 맞다는 얘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원안위가 이재명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 이전’ 방침이나 ‘노후원전 수명 연장’ 기조에 공개적으로 반기를 들 수 없는 입장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최근 여러 사안을 종합해 볼 때 독립 기관인 원안위가 정부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기관 신뢰도를 깎아 내리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원안위가 ‘국민이 신뢰하고 세계와 함께하는 원자력 안전 구현’이라는 비전에 맞게 관련 정책을 추진하기 바란다.
이석주 세종본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