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대한민국의 지역 연구개발(R&D)은 중앙정부가 사업을 기획하면 지역의 대학과 연구 기관, 기업이 참여하는 방식으로 운영돼 왔다. 이러한 체계는 국가전략 기술을 육성하고 연구 기반을 확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해 왔다. 그러나 산업 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지역별 산업구조와 기술 수요가 다양해지면서 기존 중앙정부 중심 지원 방식만으로는 지역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기 어려워졌다.
정부가 발표한 2027년도 R&D 예산안은 대한민국 R&D 정책의 변모를 보여준다. 전체 R&D 예산은 39조5000억 원에 달하며, 지역이 스스로 기획하고 추진하는 지역자율형 R&D 예산은 1400억 원에서 5500억 원으로 약 4배 확대 편성됐다. 이는 단순한 예산 확대를 넘어 지역의 산업적 특성과 기술 수요를 반영한 연구개발을 강화하고, 지역의 기획과 실행 역량을 높이려는 정책적 전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지역 R&D 예산 규모가 늘어나는 만큼 지역산업도 성장할 수 있을까? 아무리 많은 예산을 투입하더라도 지역이 무엇을 개발하고 어떤 산업을 키울 것인지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면, 예산 확대는 일시적인 지원에 그칠 수 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예산의 규모보다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이다.
이를 위해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지역에 실질적인 R&D 기획권을 부여하는 일이다. 지역의 산업적 강점과 기업의 기술 수요를 바탕으로 미래 성장 분야를 발굴하고, 필요한 연구개발 사업을 직접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중앙정부는 국가 차원의 전략 방향을 제시하되, 구체적인 기술개발 과제와 추진 방식에는 지역의 판단이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 지역이 발굴한 전략사업에 정부가 재정을 지원하는 역매칭 방식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기획권을 지역에 부여하는 것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지역에 필요한 것은 사업 선정 권한이 아니라 미래산업의 변화를 읽고 기술개발의 방향을 설계할 수 있는 전문성이다. 지역 과학기술 정책기관도 기존 사업 관리 기능을 넘어 산업·기술 동향 분석, 기업 수요 발굴, 전략사업 기획을 주도해야 한다. 기획 역량이 뒷받침되지 않는 자율성은 기존 사업의 반복이나 지역 간 유사 사업 경쟁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연구개발의 출발점도 달라져야 한다. 대학과 연구 기관의 우수한 연구 성과가 실제 산업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연구개발 초기부터 기업의 기술 수요를 반영해야 한다. 이를 위해 대학과 정부출연 연구 기관의 연구 역량을 기업의 기술 수요와 연결하고, 기초·원천 연구부터 기술 검증과 실증, 제품 개발과 사업화까지 이어지는 산·학·연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연구개발과 사업화가 유기적으로 연결될 때 지역의 연구 역량도 산업경쟁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성과를 바라보는 시각도 달라져야 한다. 지역이 수천억 원의 예산을 확보하고 수백 개의 과제를 수행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지역혁신의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정작 지역기업의 기술경쟁력이 향상되지 않고 개발된 기술이 시장에 진입하지 못한다면 R&D 투자의 효과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물론 기초·원천 연구처럼 장기간의 투자가 필요한 분야까지 단기적인 매출이나 사업화 실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기술개발의 단계와 특성을 고려한 성과 평가체계가 마련돼야 한다.
지역의 자율성이 확대될수록 중앙정부의 역할도 중요해진다. 중앙정부는 국가전략 기술과 중장기 투자 방향을 제시하고, 지역 간 중복투자를 방지하며, 공동으로 활용할 연구 기반을 구축하는 조정자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지역이 각자의 강점을 살리면서도 국가 전체의 기술경쟁력 강화라는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지원하는 것이다.
2027년은 지역 R&D 정책이 새로운 전환점을 맞는 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예산서의 숫자가 아니라 지역의 산업현장에서 확인돼야 한다. 지역이 스스로 미래 성장산업을 발굴하고, 산·학·연 협력을 통해 개발된 기술을 새로운 제품과 시장으로 연결할 수 있어야 한다. 결국 지역 R&D의 성패는 얼마나 많은 예산을 확보했느냐가 아니라, 지역이 미래산업을 얼마나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실현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