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색이 쪽빛에서 나왔으나 쪽빛보다 더 푸르다는 뜻의 청출어람(靑出於藍). 제자가 스승보다 뛰어남을 비유할 때 흔히 쓰는 이 사자성어가 최근 원자력 분야에서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그 무대는 다름 아닌 원전 종주국이자 우리의 오랜 스승인 미국이다. 최근 미국 내 대형 원전 건설 프로젝트에서 한국형 원전인 APR-1400이 추진된다는 낭보가 전해졌다. 우리가 짓는 원전을 통해 미국이 원전 건설의 노하우를 다시 전수받겠다는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 원자력 반세기의 피땀 어린 역사가 만들어낸 기념비적인 쾌거다.
1970년 대한민국 최초의 상업용 원자력 발전소인 고리 원전 도입 당시, 고리 1, 2호기는 미국 웨스팅하우스로부터 턴키 방식으로 도입됐다. 웨스팅하우스가 모든 책임을 지고 발전소를 완성해 우리에게는 열쇠만 넘겨주는 방식이었다. 원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당시 국내 사정상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1978년 발주한 고리 3, 4호기부터 한국전력이 전체 공정을 주도하며 분야별 분할 발주를 시도했다. 이어 1987년 발주한 한빛 3, 4호기는 미국 컴버스천엔지니어링(현 웨스팅하우스에 흡수)과 공동설계 방식으로 건설하며 비로소 원전 설계능력을 갖추게 됐다. 1991년 발주한 한울 3, 4호기에 이르러서는 한빛 3, 4호기를 모태로 국내 고유모델인 OPR-1000을 독자 설계하고 건설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후 OPR-1000을 개량한 APR-1400 모델은 새울 1호기를 시작으로 국내 원전에 적용됐고, 아랍에미리트와 체코 수출을 넘어 이제 미국 본토 진출까지 바라보고 있다. 50년 전 미국 기술자들 어깨너머로 배워야 했던 우리가 원전 종주국의 안방에 우리 독자 모델을 짓게 된 현실은 한 편의 감동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원천 기술을 가진 초강대국 미국은 왜 한국에 손을 내밀었을까? 그 해답은 생태계와 시공 역량의 차이에 있다. 미국은 1979년 스리마일섬 원전 사고 이후 수십 년간 신규 원전 건설을 사실상 중단해 왔다. 그 결과 원전 건설에 필요한 공급망이 무너졌고, 숙련된 전문 인력은 뿔뿔이 흩어졌다. 최근 기후변화 대응과 인공지능 산업 확장에 따른 막대한 전력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다시 원전 카드를 꺼내 들었지만, 정해진 예산과 기간 내에 발전소를 완공할 수 있는 능력을 상당 부분 잃어버린 상태다.
반면 한국은 꾸준히 원전을 건설하며 기술을 연마했고 산업 생태계를 끈질기게 지켜냈다. 그 결정체가 바로 한국형 원전 APR-1400이다. UAE 바라카 원전 4기를 성공적으로 건설하며 ‘온 타임, 온 버짓(공기 준수와 예산 충족)’이라는 놀라운 시공 능력을 전 세계에 입증했다. 더욱이 APR-1400은 2019년 미국 외의 원전 모델 중 유일하게 미국 원자력규제위원회의 까다로운 표준설계인증을 획득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전성까지 공인받았다.
이번 성과가 부산과 경남을 비롯한 동남권 지역사회에 던지는 의미 또한 각별하다. 원전 건설 산업은 다품종 소량 생산 산업이다. 두산에너빌리티 같은 대기업이 원전 주기기를 생산하지만, 펌프와 밸브 같은 수많은 기기는 대부분 전문 중소기업이 공급한다. 이번 미국 진출을 계기로 동남권 원전 기자재 공급망이 다시 활력을 띠고 지역 경기에도 훈풍이 불 것으로 기대된다. 한때 탈원전 정책으로 인한 원전 생태계 붕괴 위기를 인고와 끈질긴 노력으로 극복한 결과가 드디어 빛을 보는 순간이다.
과거 원천 기술국과의 지식재산권 분쟁 등 크고 작은 굴곡이 있었으나, 이번 미국 본토 진출은 우리가 더 이상 기술 종속국이 아니라 대등하고 필수 불가결한 글로벌 원전 파트너로 우뚝 섰음을 선언하는 사건이다. 고리 앞바다에서 지폈던 작은 불씨가 50년의 인고를 거쳐 미국 본토를 밝히는 찬란한 빛으로 타오르고 있다. 이 눈부신 청출어람의 성과가 찰나의 영광으로 끝나지 않고 미래 세대의 강력한 성장 동력으로 이어지려면, 흔들림 없는 에너지 정책과 꾸준한 연구개발 투자가 반드시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