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몸담은 대학원의 연구모임에서 ‘오랜 신문’을 강독할 때다. 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한국 문단 불세출의 대문호 나림(那林) 이병주가 젊은 시절 신문에 기고한 글이다. 세 차례에 걸쳐 쓴 것(이하 ‘해당 글’)이다. 해당 연도와 게재 날짜를 따져 보니, 국제신보(현 국제신문)의 주필 겸 편집국장을 맡기 훨씬 전의 일이다. 진주농과대학(현 경상국립대학교) 조교수로 재직하던 무렵이다. 해당 글이 돋보인 것은 단지 국제신문과의 ‘인연’만은 아니다. 주제를 ‘인권옹호’로 잡았던 까닭이다. 그것도 신문 지면이라는 공론(公論)의 장에서….
나림이 해당 글을 쓴 직접적인 계기는 당시 대검찰관 출신 엄상섭 변호사가 다른 신문에 기고한 ‘신(新) 형사소송법과 인권옹호’라는 글에서 비롯됐다. ‘100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단 한 명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는, 무죄추정의 원칙과 형사소송법의 대원칙을 담았다. 엄상섭은 ▷고문과 협박에 의하거나 교묘한 유도에 의한 자백이 죄의 증거로 제공되지 않도록 할 것 ▷고문의 금지 규정을 둘 것 ▷인신 구속과 사유재산의 압수 및 인신·주거 수색에 대해서는 법관의 권한 아래에 둘 것 ▷범죄 수사를 위한 인신 구속의 기간을 엄중하게 제한할 것 등을 주장했다. 나림은 이에 ‘깊은 감명’을 받아 해당 글을 쓰게 됐다고 밝혔다. 21세기에도 통하는 내용이니 오죽할까…. 더욱이 엄상섭은 대한민국 형법과 형사소송법 제정을 이끈 ‘한국 형법의 아버지’로 불린다.
나림은 해당 글에서 자신의 학병 시절 ‘생생한 기억’을 떠올리며 여기에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 가(家)의 형제들’에 나온 유명한 글귀를 대비시킨다. 작품 속에서 이반 카라마조프가 동생 알료사에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 내용이다, ‘한 명의 무고한 아이가 흘리는 피와 눈물로 세워지는 유토피아가 있다면, 이를 용인하겠는가’라는 인간 실존의 문제를 날카롭게 파고드는 대목이다. 이에 덧붙여 나림은 일제의 학병으로 중국 양쯔강 남쪽 어느 마을에서 겪은 일을 떠올린다. 일본군 장교가 “게릴라 하나를 잡자면 양민 100명쯤 죽여도 할 수 없다”며 서슴없이 마을 사람들을 처단했던 그 기억이다. 그래서 나림은 “인권옹호란 자기 스스로를 모욕하지 않는 한, 자기 스스로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행위를 하지 않는 한, 사회인으로서의 조건 충만이 되는 사회공약을 어기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의 인권은 최대한으로 옹호되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 나림은 “민주주의의 진실한 적(敵)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는 의식, 이에 따르는 일련의 행동”이라고 못박는다.
나림의 해당 글에서 더욱 주목하는 것은 휴머니즘에 입각한 나림의 법(法) 철학, 그리고 그 밑바탕을 제공한, 학병 서사를 포함한 일제 식민지 조선 시절 지식인의 ‘모순적 위치’가 고스란히 담긴 점이다. 훗날 나림이 문학 작품에 녹여낸 작가정신의 기본 틀이 이 무렵 잡혀있었다는 얘기다. 그때 나림의 나이는 20대 후반이었다.
나림 문학의 상수라고 할 휴머니즘과 법 철학에는 인권에 대한 중시, 부정한 법에 대한 비판, 악법의 무용성, 법률 만능주의 비판 등이 씨줄날줄로 엮인다. 그 결과물이 ‘내일 없는 그날’(1957), ‘소설·알렉산드리아’(1965), ‘예낭풍물지’(1972), ‘겨울밤’(1974), ‘철학적 살인’(1976), ‘거년의 곡’(1981), ‘그해 5월’(1984) 등이다. 그래서 나림은 ‘법률 소설가’로, ‘법에 대한 관찰과 성찰이 깊은 작가’로도 불린다.
나림은 1950년 9월 북한 인민군의 감시 아래 문예선전대를 조직, 활동했던 부역 문제로 체포된다. 이어 1961년 5월 국제신보 주필과 편집국장을 겸직할 당시 중립화 통일론에 관해 쓴 논설로 필화를 겪으면서 2년 7개월여 억울한 옥살이를 한다. 그런데 나림이 ‘법률 소설가’가 된 배경에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감옥 콤플렉스’라는 평가가 나올 정도의 옥중 체험만 있을까. 그렇지 않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나림은 이미 20대 후반 ‘법률 소설가’의 자질을 갖췄다고 보아도 될 듯하다. 옥중 체험이란 자전적 서사는 ‘법률 소설가’로 더욱 확고하게 자리매김하는 데 가속도를 붙였을 것 같다.
지난 1일은 국제신문 창간 79주년이었다. 또 지난 19일 경남 하동군 북천면 이명골길에 자리 잡은 이병주문학관에서 ‘2026년 이병주하동국제문학제’가 열렸다. 이 행사는 이병주기념사업회와 국제신문이 해마다 함께 주최하고, 하동군·경남스틸·BNK금융그룹이 후원한다. 올해는 이병주하동국제문학상 대상 수상자인 중국의 황누보(黃怒波·70) 작가(시인·소설가)가 ‘문학창작, 세계문화유산, 고산 등반, 기업가, 그리고 생의 의미’를 주제로 기조강연을 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나림 문학 세계에 관한 고찰은 갈수록 깊고 풍성해진다.
오광수 편집국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