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22일 부산신항을 떠난 팬스타 아크로호가 북극해를 지나 유럽에 닿았다. 영국 펠릭스토우항에 첫 입항한 뒤 네덜란드 로테르담, 폴란드 그단스크를 차례로 기항하고 10월 5일 부산신항으로 돌아온다. 수에즈운하를 지나는 기존 항로보다 거리는 3분의 1 이상 짧고, 운항 일수는 열흘 줄인 45일간의 여정이다. 기후 위기가 역설적으로 열어 놓은 새로운 바닷길을 국내 선사가 컨테이너 화물을 싣고 완주한 것은 처음이다. 십수 년간 학회와 토론회에서만 맴돌던 구상이 실제 항해 기록으로 바뀌는 순간이며, 부산이 아시아에서 유럽과 가장 가까운 글로벌 물류 허브로 거듭난다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물리적인 뱃길이 열린다고 그 막대한 경제적 이익이 저절로 항구 도시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과거 수에즈운하가 개통됐을 때 통항료보다 훨씬 큰 부를 거머쥔 것은 영국이었다. 그 항로를 오가는 배의 보험은 런던에서 인수됐고, 용선계약은 영국법을 기준으로 쓰였으며, 해상 사고와 관련된 분쟁은 런던의 법정과 중재소에서 판가름났기 때문이다. 항로가 세계 어디를 지나느냐보다, 계약서가 어느 나라 법으로 쓰이고 사고가 났을 때 어느 법정에서 다투느냐가 결국 자본의 방향을 결정한다. 하역과 통항료라는 1차 수입을 넘어, 해운 산업의 진정한 고부가가치는 바다 위가 아니라 금융과 법률이 교차하는 서류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번 아크로호의 시범운항이 값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시범운항 선사 공고부터 출항까지 불과 5개월. 그 짧은 시간 동안 선박 확보, 해상 보험 가입, 러시아 정부의 통항 허가, 대러시아 경제 제재 관련 리스크 등 복합적인 변수들을 동시다발적으로 해결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얻은 것은 단순한 항해 시간이나 연료 소모량 같은 물리적 데이터만이 아니다. 북극해라는 극한의 환경에서 어떤 조건으로 보험이 인수되는지, 통항 허가가 계약상 어떤 의무를 파생시키는지, 복잡한 국제 제재 조항의 리스크가 화주와 선사 사이에서 어떻게 배분되는지에 관한 살아있는 ‘실무 법률 데이터’가 처음으로 국내에 쌓인 것이다. 북위 60도 이상 운항 시 발생하는 막대한 추가 보험료의 위험 평가는 결국 누적된 운항 실적이 결정한다. 아크로호가 무사히 돌아올수록 다음 배의 보험료는 내려가고 협상력은 올라갈 것이다. 그 비용을 개별 선사에 떠넘기지 않으려면 국가 차원의 선박 금융과 재보험 지원 근거도 함께 마련돼야 한다.
문제는 이 경험과 데이터가 개별 선사와 관계자들의 서랍 속에 흩어져 있다는 점이다. 다음 배가 떠날 때 또다시 처음부터 외국 기준에 맞춰 협상하고 새롭게 시작해야 한다면, 시범운항의 가치는 절반으로 깎이고 만다.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북극항로 특별법’이 단순히 보조금을 지급하는 항로 개척 지원법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이유다. 특별법에는 반드시 북극 해역 운항에 특화된 보험 기준, 용선계약의 표준 조항, 사고 시 준거법과 관할에 관한 국내 기준이 명확히 담겨야 한다. 그래야만 우리 선사가 런던의 표준 계약서를 빌려 쓰는 대신 한국 기준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분쟁이 생기면 런던이 아닌 한국의 법정으로 오게 만들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그 분쟁을 다룰 법원이 이미 부산에 예정돼 있다. 해사 사건과 국제상사 분쟁을 전담하는 ‘해사국제상사법원’이 2028년 3월 부산과 인천에 개원한다. 특히 부산해사국제상사법원은 영남·호남·제주권의 해사민사 및 국제상사사건을 전문적으로 관할하게 된다. 북극항로의 출발점과 그 항로에서 생기는 분쟁을 다룰 법원이 한 도시에 공존하는 것은 세계 해운도시 중에서도 드물다. 아시아 물류 허브인 싱가포르가 항만 옆에 해사법원과 국제중재센터를 나란히 두고, 아시아 전역의 해사 분쟁과 자본을 끌어모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법원이 문을 여는 2028년 전까지, 특별법이 표준을 만들고, 해상법 전문 변호사와 보험 전문가, 중재인들이 이 표준을 다룰 준비를 해야한다.
10월 5일 아크로호가 45일간의 항해를 마치고 부산신항에 돌아오는 날, 우리가 진정으로 준비해야 할 것은 환영 행사가 아니라 ‘다음 배의 계약서’다. 그 계약서가 한국법으로 쓰이고, 부산의 법정을 관할로 명시하는 바로 그날, 북극항로는 비로소 온전한 우리의 항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