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막을 올린 2026 부산비엔날레 ‘불협하는 합창(Dissident Chorus)’이 오는 11월 1일까지 65일간 이어진다. 22개국 46작가·팀이 참여한 이번 전시는 부산현대미술관과 스페이스 원지, 옛 부산남고등학교를 잇는다. 소리와 몸, 퍼포먼스를 통해 서로 다른 존재들이 관계 맺는 방식을 살피고, 하나의 목소리로 환원되지 않는 연대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불협하는 합창’은 흥미로운 명제다. 합창은 모두가 같은 음을 내는 일이 아니다. 서로 다른 음색과 높낮이가 각자의 차이를 지키면서도 하나의 울림을 이루는 과정이다. 공식적인 역사에서 밀려난 기억과 노동, 이주와 저항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겠다는 전시의 취지는 분열과 단절이 깊어진 오늘의 현실을 향하고 있다.
그 명제를 부산으로 되돌려보자. 서로 다른 목소리들의 공존을 말하는 비엔날레에, 정작 부산미술인들의 목소리는 얼마나 들어 있는가. 이는 지역 작가를 몇 명 더 참여시키자는 지분의 문제가 아니다. 이 도시가 축적해 온 예술의 시간과 사람, 공간이 비엔날레의 사유 속에서 어떻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부산미술의 역사는 결코 얕지 않다. 해방 직후인 1946년 부산미술가동맹에서 출발한 부산미술협회는 올해로 80주년을 맞았다. 국가의 제도도, 문화적 기반도 온전히 마련되지 않았던 시절 예술가들은 스스로 조직을 만들고 전시를 열었다. 한국전쟁과 피란수도의 혼란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다. 부산의 예술은 행정이 그어놓은 도면 위에서 세워진 것이 아니라, 삶의 절박함 속에서 스스로 길을 내며 자라났다.
부산비엔날레의 기원도 이 흐름과 다르지 않다. 1981년 부산청년비엔날레, 1987년 바다미술제, 1991년 국제야외조각심포지엄을 거쳐 오늘의 체계에 이르렀다. 정치적 명분이나 해외 유명 기관의 브랜드가 먼저였던 행사가 아니다. 새로운 미술을 향한 지역 작가들의 열망과 실험, 시민의 참여가 국제전의 형식을 아래에서부터 밀어 올렸다. 부산은 세계적인 미술행사를 건네받은 도시가 아니라, 그 형식을 스스로 일구어낸 도시다.
최근 부산의 문화정책에서는 ‘세계적인 미술관’과 ‘글로벌 문화도시’라는 거대한 담론이 자주 등장한다. 국제적 교류와 수준 높은 해외 전시는 필요하다. 그러나 이름난 기관과 작가를 불러오는 것만으로 한 도시의 문화가 깊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부에서 옮겨온 나무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잠시 머물다 사라진다. 세계성은 지역성을 지운 자리에서 얻는 훈장이 아니라, 한 도시의 고유한 경험이 세계의 언어를 획득하는 과정이어야 한다.
부산을 무대로 삼는 비엔날레와 부산의 예술적 전통에서 성장하는 비엔날레는 같지 않다. 무대는 이미 완성된 것을 보여주고 행사가 끝나면 비워지는 곳이다. 토양은 보이지 않는 시간을 품고 아직 오지 않은 것을 길러내는 곳이다. 비엔날레가 부산이라는 장소를 배경으로 소비하는 데 그친다면 도시는 거대한 전시 장치로 남는다. 그러나 이곳의 역사와 관계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다음 시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도시는 무대가 아니라 토양이다.
과거 부산비엔날레에는 지역의 대안공간들을 연결하는 프로젝트가 있었다. 당시 필자가 운영하던 ‘대안공간 비움’에서도 그 연계 프로그램으로 김은주 작가 초대전을 개최했다. 국제전의 지도가 미술관에서 끝나지 않고 도심의 작은 공간까지 이어지자, 작가와 관람객은 미술관 밖 일상의 거리에서 비엔날레를 만났다. 지역의 작은 공간들이 중심 행사의 장식으로 동원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현장에서 비엔날레의 경계를 넓혔던 경험이다.
그 가능성은 지금도 존재한다. 최근 부산 퐁피두미술관 분관 유치를 둘러싼 논쟁 속에서 열린 ‘퐁·반500展’에서는 부산 전역의 28개 갤러리가 하나의 문제의식 아래 연대했다. 서로 떨어져 있던 전시장들이 연결되자 도시 곳곳에 새로운 문화적 동선이 생겼고, 개별 공간은 공동의 목소리를 내는 공론장으로 확장되었다. 비엔날레의 지도가 부산현대미술관에서 멈추지 않고 원도심과 골목의 갤러리, 대안공간까지 이어진다면 어떨까. 부산 전체가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전시가 될 수 있다.
지역의 원로·중견·청년 작가와 국제기획자가 함께 작업하고, 부산미술협회 80년의 기록이 새로운 창작의 자료가 되며, 시민이 관람을 넘어 제작과 토론에 참여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관계가 폐막과 함께 철거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세계적인 비엔날레는 세계가 부산으로 찾아오는 데서 완성되지 않는다. 부산이 자신의 역사와 목소리로 세계와 만날 때 비로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