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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대원 작가의 ‘온정리 풍경’. |
서양화가 이대원(李大源, 1921~2005)은 한 때 한국의 부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화가라 불렸을 만큼 유독 경제적으로 넉넉한 상류층에게 인기가 있었다. 대형 화랑에서 주로 취급했고, 고객들도 부유층이었으며, 그에 따라 작품값도 꽤 비쌌다. 서울 강북의 부자촌, 강남 아파트의 거실에는 이대원 그림 한 점은 걸려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시대를 상징하는 작가였다. 유럽에 르노와르가 있고 일본에 우메하라 류자브로가 있다면, 한국에는 이대원이 있다는 말을 하는 이도 있었다.
그토록 인기가 있었던 화가였지만 화단에서 그의 위치는 그리 우호적이지 못했다. 일찍부터 그림을 그리긴 했지만 미술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경성제국대학 법학과를 다닌 비전공자였기 때문이다. 당시 화단은 일본 유학 등을 통해 미술 공부를 한 화가들이 기득권 세력을 이루고 있어 의도적으로 멀리한 이유도 크다. 미술사학자나 비평가들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더욱 가혹했다. 개성 있는 다양한 그림 양식을 회화성이 부족한 소위 ‘예술성’이 떨어지는 것으로 얕잡아 보기도 하였다. 모두 미술대학을 다니며 아카데미즘 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선입견에서 생긴 무지한 평가였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는 대규모 회고전 ‘당신을 슬프게 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화가 이대원에 대한 기존 평가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전시이다. 첫 작품인 12세 때의 유화는 어려서부터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작품이다. 경성제2고등보통학교(현 경복고등학교) 시절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상을 받았던 작품과 젊은 시절의 작품들을 대거 소개한 부분은 이대원 미술 세계의 근원을 잘 보여준다. 특히 한국에서 처음 소개되는 고보 시절 스승 사토 쿠니오(佐藤九二男)의 작품과 자료는 이대원뿐만 아니라 유영국, 장욱진 등 그의 영향을 받은 많은 근대 화가들을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근대 미술사의 공백을 채워주는 중요한 사건이라 할 만하다.
전시장을 둘러보자니 유독 1941년 작품 ‘온정리 풍경’이 눈에 띈다. 본래 금강산이 유명하기도 했지만 1930년대에 경원선 철도가 내금강까지 연결된 이후에는 금강산을 찾는 이들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화가들도 많이 찾아 금강산을 그리는 것이 대유행이 되었다. 미술대학을 가고 싶었으나 부모님의 반대로 경성제국대학 법학과에 입학한 이대원은 1학년 겨울방학 때 금강산을 찾는다. 꿈에 부풀어 외금강 초입 온정리에 도착하여 금강산에 들어가려 했으나 눈이 너무 많이 와 들어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이틀간을 머물게 된다. 실망도 잠시 순간 그의 눈에는 저 멀리 보이는 금강산의 모습이 온정리의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게 보였다.
이대원은 이젤을 펼치고 캔버스를 놓은 후 화폭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설레는 마음에 붓끝이 흔들렸다. 가까운 곳에는 마을 초입이라는 것을 알리는 장승과 지역 표식인 온정장(溫井莊)을 그리고, 크고 작은 집들을 밝고 화려한 색감의 대비를 주어 율동감 있게 표현하였다. 집 뒤로는 초록빛으로 나무와 숲을 그렸고, 그 뒤로 멀리 눈 내린 겨울 금강산의 모습을 갈색조로 표현하였다. 갓 고보를 졸업한 시기의 작품임에도 구도나 색감의 표현이 과감하면서도 자연스러워 매우 능숙한 솜씨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