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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하네스 브람스 |
9월이 되면 시간이 꽤 흘렀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아직 한 해의 중간쯤에 와 있는 것 같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나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시계는 조금 늦게 가는 것 같다. 무언가 시간이 늦게 가는 것 같은 작곡가, 가을 하면 브람스. 문득 유학 시절 후반부를 잠식했던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 Bb장조, 작품 83이 떠올랐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나는 이 곡을 혼자서 꽤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연습했다. 어떤 날은 연습 시간 전부를 이 곡에 쓰기도 했고, 꽤 많은 날 연습의 시작이 이 곡의 4악장이었다. 돌이켜보면 레슨을 받지도 않는 곡을 그렇게 오랫동안 연습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대학원 수업과도 전혀 관계없는 이 곡이 어쩌면 그 시절 나에게는 작은 출구였을까.
브람스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은 상당히 규모가 큰 작품이다. 모두 네 악장으로 연주 시간도 50분에 달한다. 피아노 협주곡이지만 구성과 성격에서 교향곡에 가까운 면모를 보여준다. 1악장은 담담한 호른의 선율로 시작한다. 곧 피아노가 이를 이어받는데, 브람스의 다른 여러 작품에서처럼 이 곡에서도 호른의 존재감은 매우 크다. 호른을 즐겨 연주한 아마추어 음악가 아버지의 영향이었을 것이다. 2악장은 독특한 스케르초 악장이다.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리듬을 빠르게 주고받으며 음악에 긴장과 활기를 더한다.
3악장은 마치 큰 오케스트라 안에 작은 실내악이 들어 있는 것 같다. 첼로가 긴 선율을 시작하고 오보에와 플루트가 곁에서 소리를 보탠다. 피아노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 첼로가 혼자 길게 노래하는 선율에는 브람스의 짙은 낭만성이 배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이 협주곡의 3악장을 특히 인상 깊게 기억하는 것 같다. 첼로의 선율은 뜨거운 구애의 메시지라기보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 사이의 진한 우정과도 같은 격려에 가깝다. 편안함과 다정함이 함께 하는 3악장은 마지막에 이르러 첼로와 피아노의 속삭이는 대화로 끝난다. 오래된 친구 사이에서만 가능한 사려 깊은 대화처럼.
4악장은 유난히 표정이 많은 악장이다. 아주 가볍게 시작했다가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주고받는 사이 분위기가 몇 차례 바뀐다. 장난스럽게 들리는 순간이 있는가 하면 어느새 진지한 서정성이 묻어난다. 마치 얼굴을 계속 바꾸는 듯한 4악장의 마지막은 처음의 가벼움은 온데간데없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가 한꺼번에 힘을 쏟아내며 곡을 끝맺는다.
브람스가 이 곡을 완성한 것은 마흔여덟 살 때였다. 이미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고하게 만들어가던 시기였지만, 이 협주곡에는 뜨거운 젊음의 에너지가 넘친다. 원숙함과 열정이 함께 있는 곡이다.
열흘 전, 이 곡을 음악회에서 오랜만에 들었다. 워낙 규모가 큰 작품이라 무대에서 자주 만날 수 있는 곡은 아닌데, 오랜만에 실연으로 들으니 역시 이 작품이 가진 규모가 실감 났다. 그날 협연자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친구였다. 예원학교 시절 작곡에도 재능이 뛰어났던 그 친구를 우리는 ‘베토벤’이라고 불렀다. 세월이 훌쩍 지나 브람스를 연주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는 ‘브람스’로 별명을 바꿔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렬함과 섬세함이 있었고, 동시에 여유도 있었다. 때로는 매력적일 만큼 요염하게 프레이즈를 끌고 가기도 했다. 브람스의 중후함을 한껏 담아내면서도 그의 소리는 여전히 젊었다. 그 연주를 듣고 있으니 유학 시절 연습실에서 이 곡을 붙들고 있던 시간이 문득 떠올랐다.
어느덧 우리가 브람스가 이 곡을 쓰던 시기를 가까이 바라볼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에 잠시 기분이 묘해졌다. 가을이 온전히 오기 전, 인디언 서머처럼 다시 뜨거운 날들이 찾아올 것 같다. 시간은 조금 늦게 가도 좋겠다. 여름의 끝자락과 가을 사이, 느리게 걷는 시간과 함께 브람스의 음악에 천천히 잠겨보고 싶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