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5일은 광복 81주년이었다. 매년 광복절이면 우리는 일제강점기의 상흔과 함께 독립을 위해 헌신한 이들을 기억한다. 올해는 예년과 달리 평소 광복절 소회에 덧붙여 산업의 흥망성쇠가 국가 위상을 어떻게 바꾸는지를 짚어볼 만도 하다. 최근 일본 정부와 조선업계가 2019년 이후 사실상 맥이 끊긴 액화천연가스(LNG) 운반선의 일본 내 건조를 되살리기 위해 한국과 기술 협력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세기 전 한반도의 처지를 떠올리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우리는 선박 건조 기술과 자본을 해외에 의존했다. 1971년 현대는 울산조선소 건설을 준비하며 영국 A&P 애플도어, 스콧 리스고와의 기술 협력 계약과 함께 바클레이스은행에서 자금을 조달했다. 그렇게 첫발을 뗀 한국 조선산업은 반세기 만에 세계 최고 수준의 LNG선 설계와 건조 역량을 축적했다. 그리고 한때 우리가 뒤쫓던 일본은 지금 한국의 경험과 기술을 부러워하고 있다. 산업사의 대역전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한일 간 순위 교체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산업혁명 이후 ‘세계의 조선소’로 군림한 영국은 1890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세계 조선시장을 압도했다. 하지만 전간(戰間)기에 점유율을 잃었고, 1948년부터 1970년 사이에는 생산량마저 절대적으로 감소했다. 생산조직 혁신이 지체되고 노사 간 불신으로 개혁이 좌절된 결과였다. 철옹성 같던 우위도 시대의 전환을 놓치면 무너지는 것이 성쇠무상의 교훈이다.
일본의 LNG 운반선 건조 재개와 부활 노력도 이 맥락에서 읽어야 한다.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은 섬나라에서 LNG 운반선은 단순한 수출 상품이 아니라 에너지 안보를 떠받치는 전략 자산이다. 한국과 일본이 최근 LNG 수급 협력과 원유 수급·비축 정보 공유를 강화하기로 한 것 역시 중동 정세와 해상 공급망의 불확실성이 커진 데 따른 전략적 선택이다. 조선산업이 다시 경제 안보의 영역으로 들어온 것이다.
조선산업이 감당해야 하는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에서 LNG 다음 세대 경쟁 영역으로 최근 들어 액화수소가 부각되고 있다. 수소는 영하 253도에서 액화하면 부피가 약 800분의 1로 줄어 대량 해상 운송이 가능해진다. 영하 162도 안팎인 LNG보다 기술 난도가 비약적으로 높다. 단열과 증발가스 관리, 극저온 기자재와 하역 안전을 함께 풀어야 하는데 미지의 영역이 너무 많다. 아직 대규모 상업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과거 LNG 시장의 태동기와도 닮아 있다. 이런 액화수소 시장에서 이번에도 일본이 먼저 실증의 문을 열었다.
가와사키중공업은 세계 최초의 액화수소 운반선 ‘스이소 프론티어’를 건조해 2022년 호주에서 생산된 액화수소를 일본으로 운송했다. 이어 2026년 1월에는 4만 ㎥급 운반선 건조 계약을 체결했다. 상업 규모 공급망을 향한 교두보를 놓는 행보다. 일본 정부도 수소와 그 유도체의 공급량을 수소 환산 기준으로 2040년 연간 약 1200만 t까지 확대한다는 목표를 제시하는 등 매우 공격적으로 외연 확장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산대 수소선박기술센터가 주관하는 국책 컨소시엄은, 국내 조선 3사와 주요 기자재 기업들과 함께 일본 실증선보다 규모도 크고 첨단 사양을 보유한 2000㎥급 액화수소 운반선의 설계·건조·시운전을 추진하고 있다. HD한국조선해양은 8만 ㎥급 전기 추진 액화수소 운반선 설계의 선급 기본승인을 확보했다. 일본이 실증에서 앞섰다면 우리는 대형화와 국산화, 운항 실증까지 묶어서 한번에 추월하는 전략을 쓰고 있는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미 결론이 난 과거의 승패가 아니라 다음 표준을 누가 선점하느냐다. 한국 조선업은 세계 최고 수준의 LNG 운반선 기술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원천 기술에서는 여전히 프랑스 GTT 의존도가 높다. LNG에서 겪고 있는 ‘미완의 자립’을 액화수소에서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조선소를 중심으로 화물창과 단열재 펌프·밸브·배관 엔진 용접 설계 선급 항만 금융과 해운이 하나의 완성형 생태계를 이루어야 한다.
부산항도 액화수소를 하역하는 통과항 기능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미래 항만의 경쟁력은 물동량뿐 아니라 항만을 중심으로 뿌리내린 기술과 기업의 수준에 달려 있다. 액화수소의 인수·저장·벙커링은 에너지 수급 산업의 기반이 될 수 있으며, 미래형 첨단 복합에너지항으로 재편될 자산이다.
81년 전 광복절은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날이다. 21세기 주권은 국경선만으로 지켜지지 않는다. 에너지를 확보하고, 운반할 선박을 만들며, 공급망을 스스로 유지하는 능력은 국가의 자립을 떠받친다. 산업의 역사에 영원한 승자는 없다. LNG에서 이룬 역전은 종착점이 아니라 다음 승부의 출발점이다.
광복 81년, 일본이 한국의 LNG 기술을 바라보는 지금, 우리는 다음의 산업 주권과 다음의 바다를 생각해야 한다. 액화수소가 중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