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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리풀 보이는 수장고’ 투시도. 서울시 제공 |
부산의 문화정책이 중요한 갈림길에 서 있다. 오페라하우스와 콘서트홀, 퐁피두센터 부산 등 국제문화도시를 겨냥한 사업들이 추진됐지만, 시정 변화 이후 상당수가 재검토되면서 무엇이 유지되고 무엇이 바뀌는지 시민이 알기 어려운 상황이다. 퐁피두센터 부산이 사실상 백지화 수순을 밟는 가운데 북항에는 지역 예술인 전시 공간 조성이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정작 핵심 질문은 빠져 있다. 지금 부산에 필요한 문화시설은 무엇이며, 누구를 위한 시설이어야 하는가.
국제박물관협의회(ICOM) 관련 법령이 명시하듯, 공공 박물관과 미술관의 존재 이유는 특정 계층이 아니라 시민 모두를 위한 공공 서비스에 있다. 공공 전시 공간을 지역 작가 전용으로 한정하는 것은 지역 예술을 외부와 단절시켜 경쟁력을 약화시킬 뿐만 아니라, 시민의 폭넓은 문화 향유권까지 제한할 수 있다.
지역 예술인 지원은 물론 중요하다. 부산은 부산문화재단을 통해 비수도권 최대 규모인 약 95억 원의 문화예술 지원 예산을 편성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 정책이 새로 조성되는 공공 문화시설을 지역 작가 전용 공간으로 한정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예술인 지원과 공공 문화시설은 목적이 다른 정책이다. 지역 예술의 경쟁력은 보호보다 교류에서 나온다. 국내외 작가들이 함께 전시하고 교류할 때 시민은 더 수준 높은 문화를 누릴 수 있고, 지역 예술인은 더 넓은 무대로 나아갈 기회를 얻는다.
일각에서는 퐁피두센터 부산 대신 시립미술관과 현대미술관을 강화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두 미술관은 이미 대규모 리모델링과 예산 투자를 거쳤다. 이제는 단순한 예산 확대보다 정책적 전환을 통해 국제 협력과 전문 인력 확보, 연구 기반 조성 등 문화 인프라의 질적 경쟁력을 높이는 데 집중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부산이 주목해야 할 대안이 ‘보이는 수장고(Open Storage)’다. 오늘날 수장고는 단순한 보관 공간을 넘어 보존·관리·연구의 전 과정을 시민에게 공개함으로써 새로운 전시 경험을 제공하는 ‘뮤지엄의 심장’으로 진화하고 있다.
부산시립미술관과 현대미술관은 수장고가 이미 포화 상태에 이르렀고, 보존·복원 시설과 인력 또한 부족하다. 반면 국내 주요 지자체와 정부는 개방형·통합형 수장고를 구축하며 보존·연구·전시·교육 기능을 확대하고 있다. 이는 수집과 보존 중심에서 공유와 활용 중심으로 전환되는 세계 뮤지엄의 흐름과 맞닿아 있다.
그러나 현재 부산시의 문화정책 계획을 보면 아쉬움이 크다. 부산은 300억 원 미만의 예산으로 폐교를 리모델링해 시 산하 박물관·미술관의 소장 자원을 통합하는 수장고를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하지만 수장고는 대형 작품을 수용할 수 있는 충분한 층고와 유기적인 동선, 작품의 수명을 좌우하는 정밀한 환경 제어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 고도의 전문 시설이다. 구조적 한계를 지닌 폐교 리모델링만으로는 이러한 기능적 완결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2018년 600억 원 규모로 건립된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을 시작으로, 2026년 강원도 횡성에 약 700억 원으로 조성된 서울문화유산센터, 현재 약 900억 원으로 추진 중인 국립현대미술관 대전관(국립미술품수장보존센터), 그리고 2029년 개관을 목표로 하는 약 2000억 원 규모 서울시 서리풀 보이는 수장고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개방형·통합형 수장고 구축이 활발히 추진되고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부산이 제한된 예산과 폐교 리모델링이라는 제약 속에서 수장고 건립을 추진한다면, 수장고의 전문성과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를 피하기 어렵다.
최근 부산 벡스코에서 열린 제48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와 대한민국관 전시의 성황은 부산 시민의 문화예술에 대한 높은 관심과 수요를 보여준다. 이제 필요한 것은 새로운 건축물의 수가 아니라, 부산의 문화예술 자산을 연구하고 보존하며 시민과 공유하는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어떤 건물을 짓느냐가 아니라 어떤 문화정책을 선택하느냐다. 부산이 진정한 문화도시를 지향한다면 시민과 지역 예술이 함께 성장할 문화 인프라를 장기적이고 전문적인 관점에서 구축해야 한다. 제대로 된 수장고를 구축하는 일은 문화예술 자산을 더 민주적이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운영하겠다는 부산의 의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