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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마음의 결을 만든다.
공자는 예순을 일컬어 ‘이순(耳順)’이라 하였다. 귀가 순해지는 나이. 어떤 말도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경지를 뜻한다. 말속의 이치와 사정을 있는 그대로 헤아릴 수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그런데 왜 하필 ‘귀’가 순해진다고 했을까. 상학(相學)에서는 귀를 ‘채청관(採聽官)’이라 부른다. ‘캘 채(採)’에 ‘들을 청(聽)’을 쓴다. 들리는 대로만 듣지 말고 분별하여 취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 말은 곧, 무엇을 어떻게 듣느냐가 마음의 결을 좌우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귀는 고막의 진동을 받아 뇌의 경맥으로 소리를 전하는 관문이다. 귀로 스며든 파동은 그 안에 담긴 내용과 함께 뇌에 정보를 전달한다. 그 정보는 심중에 차곡차곡 쌓여, 결국 눈빛과 행동으로 드러난다. 유년기부터 좋은 소리를 듣고 자란 이가 그렇지 못한 이보다 심성이 곱고 사유가 반듯한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귀는 뇌를 관장함과 동시에 심흉(心胸)을 거쳐 마음을 다스리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듣고 마음에 채우느냐가 한 인간의 본질을 빚는다. 우리가 누군가의 귀를 살피며 품성과 덕망을 읽어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릇이 반듯하면 내용물도 반듯하게 담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의 소리를 잘 담아내는 귀는 어떻게 생겨야 할까. 귀는 위아래가 둥글고 윤곽이 또렷하며, 살집이 두툼한 형태를 상격(上格)으로 친다. 이런 귀를 가진 이는 지혜가 넉넉하고 복덕이 깊어, 남을 돕고도 이를 드러내지 않는 대인의 풍모를 갖춘다. 밖으로 드러나는 양덕(陽德)을 넘어, 베풀었다는 의식조차 남기지 않는 음덕(陰德)의 심성이 자연스레 자리 잡는다. 또한 귀가 잘생기고 단단하면 의지가 굳세어 뜻한 바를 끝내 이룬다. 정(情)을 주관하는 귓불이 풍성하고 윤택하면 인정과 포용력도 넉넉하다.
관상에서 귀를 중시하는 이유는 성품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는다. 귀는 신장의 건강 상태가 밖으로 드러나는 거울이자 생명력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신장의 기운이 충실한 사람은 귀가 밝고 정신이 또렷하다. 이 기운이 허해지면 판단이 흐려지고 마음마저 쉽게 혼탁해진다. 귀의 생김새와 기색은 한 인간의 정력과 원기를 대변하며, 생식 작용을 주관하는 성(性)적 에너지와도 맞닿아 있다. 내면의 원기가 맑고 단단하다는 것은 주체성이 확고하다는 뜻이다. 외부의 유혹과 소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지혜가 된다.
이처럼 귀의 생김새가 한 인간의 본바탕을 보여준다면, 귀의 ‘기색(氣色)’은 현재의 운을 다스리는 지표가 된다. 제아무리 귀 모양이 수려해도 먼지가 낀 듯 거무튀튀하고 윤기가 없으면 우환이 따르기 쉽다. 반면 평소 귀의 색이 얼굴빛보다 밝고 맑으면 좋은 운이 움직이고 있다는 징조로 본다. 세상에 완벽한 귀는 드물다. 어느 부분이 좋으면 다른 한 부분이 부족한 것이 다반사다. 그러니 좋은 귀의 형태에 부합되지 않더라도 실망할 필요는 없다. 타고난 외형이 다소 부족할지라도, 맑은 기색을 유지한다면 충분히 이를 보완할 수 있다.
같은 칼도 명장의 손에서는 요리가 되고, 흉수의 손에서는 무기가 된다. 외형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움직이는 내면의 격이다. 관상(觀相)보다 심상(心相)이 먼저인 이유다. 자신의 생김새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삶의 결을 다듬어가는 마음가짐 자체가 곧 좋은 심상의 출발점이다.
귀는 일종의 안테나다. 좋은 소리를 제대로 수신해 지혜로움을 만들고, 그 지혜는 다시 눈빛으로 드러난다. 애석하게도 요즘 세상은 경청의 미덕을 잃어버린 듯하다. 너도나도 자신을 드러내기에 급급하다. 공자가 말한 이순(耳順)은 나이 예순을 넘겼다고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타고난 ‘꼴’을 넘어, 내 안의 소음을 잠재우고 세상의 이치에 온전히 귀를 내어주는 태도다. 그때, 비로소 참된 예순의 문이 열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