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아침부터 뒷산에서 뻐꾹새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려온다. 큰 몸집에다 이름 그대로 뻐꾹뻐꾹 우는 소리의 파장이 커서도 그렇겠지만, 생태적으로 오뉴월이 뻐꾹새의 활동 시즌 때문이기도 해서 그럴 테다. 오뉴월이면 한창 농사철이라 이때 많이 운다고 해서 뻐꾹새에겐 ‘포곡조(布穀鳥)’라는 별칭도 있다. ‘곡식을 퍼뜨리는 새’라는 뜻으로.
과거에 조상들이 농번기와 겹치는 뻐꾹새 소리를 권농의 상징으로 보아 풍요를 염원하는 의미로 그런 한자어를 붙인 것 같다. 나도 어릴 적엔 뻐꾹새 소리를 들으며 보리 베어 타작하고 모심고 하였으므로, 농사철에 익숙한 소리로 각인되어 있다. 너무 어린 나이에 농사 거들다 수확한 보리 몽땅 날릴 뻔한 적도 있지만.
지금은 보리밥을 잘 먹질 않아 특별한 사정이 있지 않고는 보리 경작하는 농가가 드물다. 하지만 내 어릴 적에는 이모작 가능한 논은 물론이고, 산간의 대부분 밭에도 보리농사를 지었다. 기후적으로 무논은 벼농사만 가능하여 5월 말에서 6월 초에 모심기를 마쳤다. 지금은 온실에서 묘판을 키우기 때문에 좀 더 일찍 끝내지만. 이모작 가능한 논은 귀퉁이에 못자리를 만들어 놓고 이맘때쯤 보리타작을 했다. 그 후 물을 대어 쟁기질한 다음 모심기를 하는데, 이즈음이 뻐꾹새 소리의 절정기다.
어릴 적, 우리 집에도 이모작 논이 일곱 마지기 있었다. 열세 살 때 억울하게 남의 손에 넘어가기 전까지는. 성인이 되고 나서 재보니까 일곱 마지기도 그리 크게 보이지 않는다만, 어린 눈에는 그 규모가 상당해 보였다. 열두 살 이맘때, 그 논에서 보리 수확을 하게 됐다. 6월은 장마철이기도 하여 보리타작을 재빨리 끝내야 했다. 한데 지금처럼 콤바인도 없던 시절 아니던가. 발동기 아재(발동기와 탈곡기를 가지고 다니며 탈곡 대행하는 사람)에게 탈곡을 부탁하고선 날짜를 기다려야 했는즉 보리를 베어 들판에 그대로 놔둘 순 없었다.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큰일이므로.
그 일곱 마지기의 이모작 논에서 벤 보릿단을 집 마당으로 날라야 하는 일이 벌어졌다. 발동기 아재와의 탈곡 약속일이 너무 길어서. 베어 놓은 보릿단을 손수레에 실어 나르는 일을 나와 동생이 거들기로 했다. 그때의 손수레는 농사용에 맞게 만든 것이라 도심에서 운용하는 손수레와 달리 차체가 제법 컸다. 그 손수레에 보릿단을 차곡차곡 싣다 보니 과적을 했다. 내 체격은 물론 겨우 열 살이었던 동생의 체격은 고려하지 않고.
그 과적된 손수레를 내가 앞에서 끌고 동생은 뒤에서 밀고 둔덕 같은, 경사진 수로 교량으로 올랐다 내려오다 길옆 논바닥에 그대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오르막을 오를 땐 가속도를 붙여야 해서 힘껏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 올랐는데, 내 힘과 체격이 손수레를 제어할 수 없는 정도가 되어 전복 사고가 난 것이다.
손수레 앞 손잡이에 몸이 붕 떴다가 길 아래로 내리꽂혔음에도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전복될 때, 가득 실었던 보릿단이 손수레의 충격을 흡수해 준 덕분이었다. 또 한 가지 다행은 사고가 난 그곳 역시 보리 수확을 막 하던 참이라 논에 물을 대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 댄 논에서 사고 났다면 보릿단이 물에 다 젖고 말았을 것 아닌감.
그런 다행 때문인지, 아니면 내 잘못을 알아서인지는 몰라도 그다지 성은 나지 않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무단히 동생한테 화풀이를 쏟았을 텐데. 하지만 논바닥에 처박힌 멋쩍음도 돌릴 겸 사고에 대한 분풀이성 책잡느라고 괜스레 먼 산 뻐꾹새에다 욕지기를 퍼부었다. “아, 저 뻐꾹새 소리 지랄 맞네. 날도 덥건마는”.
당시 양식 사정으론 보리쌀 한 톨도 귀한 때였던 터라 그 사고로 보리 수확에 차질을 빚었다면, 뻐꾹새가 ‘포곡조’가 아니라 우리 가족한테는 ‘망곡조(亡穀鳥)’가 될 뻔했잖은가. 어릴 때의 그 사건이 몸에 새겨져서 그런지 유독 뻐꾹새 소리는 해마다 크게 들려온다. 포곡조 의미처럼 이 땅의 모든 농가에 풍요한 수확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그만큼 커서 그런지는 모르겠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