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선진국은 보편적 의료서비스 보장을 위해 의료재정체계와 의료제공체계로 구성된 국가의료제도를 갖추고 있다. 의료재정체계는 의료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필요한 재원을 공적 방식으로 조달하는 기제를 말한다. 의료제공체계는 의원·병원(종합병원)·상급종합병원 등 각급 의료기관들이 의료서비스를 단계적으로 전달하는 기제를 말한다. 의료재정체계와 의료제공체계는 국민의료의 보장을 위해 ‘유기적으로’ 작동하는데, 사례로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매달 건강보험료를 내는 당뇨병 환자 홍길동 씨는 3개월마다 동네의원을 찾았고, 외래 진료의 대가로 의료비의 30%(본인부담금)를 납부했다(70%는 국민건강보험이 지급). 어느 날 홍 씨는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종합병원에 입원했고, 퇴원 후에는 동네의원이 아니라 그 종합병원에서 외래 진료를 받는다. 이에 따라 의료비 부담도 늘었는데, 홍 씨는 진료비의 30%를 부담하던 동네의원과 달리 종합병원 외래 이용에서 50%를 내고 있다. 상급종합병원(대학병원)이라면 본인부담률이 60%다. 이런 차등적 비용 부담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상급종합병원 이용을 선호한다. 이것이 대형 병원 ‘환자 쏠림’이다.
모든 선진국은 의원·병원(종합병원)·상급종합병원 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대형 병원 ‘환자 쏠림’ 현상은 거의 없다. 의료서비스의 단계적 이용을 의미하는 ‘의료전달체계’가 확립돼 있기 때문이다. 즉 지역 주민의 일반적인 건강·질병 문제는 주치의 관계를 맺고 있는 동네의원에서 체계적으로 해결하고, 주치의의 종합적인 판단·의뢰에 따라 종합병원을 이용한 환자는 검사와 치료 후 동네의원의 주치의에게 회송돼 지역사회에서 포괄적 치료·관리를 지속적으로 받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의료전달체계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한마디로, 동네의원이 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료전달체계(동네의원-병원·종합병원-상급종합병원)의 근간이자 중핵은 동네의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동네의원은 아파서 찾아오는 환자에게 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만 머물러 있고, 지역 주민의 건강증진과 질병예방을 위한 활동은 거의 하지 않는다. 찾아오는 만성질환자를 치료하지만, 이들의 건강과 질병을 체계적으로 관리하진 않는다. 거동 불편 재택 환자를 방문하지도 않는다. 따라서 동네의원과 지역 주민은 치료 서비스의 수급을 둘러싼 일시적 또는 단골 관계일 뿐이다.
우리나라 동네의원이 일차의료 제공자(주치의) 역할 대신에 아파서 찾아오는 환자를 치료하는 데만 머물게 된 데는 협소한 ‘행위별수가제’ 탓이 크다. 행위별수가제는 진료 행위마다 항목별로 가격을 책정해서 진료비를 보상하는 방식인데, 치료 서비스에 대한 보상 방안으로 적합하다. 그런데 일차의료 제공자로서 동네의원의 역할은 치료뿐만 아니라 건강증진·질병예방과 만성질환의 체계적 관리까지를 포함한다. 여기서 문제는 치료를 제외한 건강증진 등의 일차의료 활동은 잘게 쪼개진 항목별 행위별수가제로는 보상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대다수 선진국에서는 주치의의 진료와 일차의료 활동에 대해 ‘행위별수가제’뿐만 아니라 ‘인두제 + 성과보상’ 방식을 함께 적용한다.
인두제는 일정 기간 주치의 등록자 1인당 고정 금액(정액)을 적용하는 방식인데, 건강증진과 질병예방을 포함해서 등록 주민·환자의 건강과 질병에 대한 총체적 치료·관리를 수행하는 주치의의 노력에 대한 보상이다. 여기서 등록자의 의료 필요도(나이, 만성질병 유무, 빈곤 등)와 농어촌 등 취약 지역 특성을 고려해서 주치의의 업무량과 부담을 기준으로 인두 정액의 분배가 공정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러니까, 인두제가 적용되는 선진국의 동네의원은 행위별수가제 방식인 우리나라 동네의원과 행태가 크게 다르다.
시민단체와 정책 전문가들은 과잉 진료 등 의료 자원 낭비를 이유로 행위별수가제를 비난하고, 의료계는 인두제 도입 가능성을 비판·경계한다. 하지만, 일차의료 발전을 통한 지속 가능한 선진국형 의료전달체계 확립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제 오해를 풀고 각각의 장단점을 비교하면서 상호 이해 수준을 높여야 한다. 행위별수가제는 치료 중심 의료서비스에서 반응성과 생산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첨단 의료 기술 도입에도 유리하다. 인두제는 연간 등록제 방식으로 주치의와 등록 주민·환자 간 지속적 신뢰 관계를 기반으로 건강증진·질병예방 및 만성질환 관리 등 일차의료 발전에 유리하다.
두 방식을 혼용하는 지혜가 요구된다. 행위별수가제는 잘게 쪼개진 행위 항목의 협소함을 일부라도 극복할 필요가 있고, 인두제는 관료주의적 비효율을 방지하기 위해 연간 성과 평가에 따른 보상 방안을 함께 운영해야 한다. 프랑스는 동네의원의 매출에서 행위별수가제의 비중이 75~80%, 인두제 10~15%, 성과 보상 5~10%다. 네덜란드는 행위별수가제 20%, 인두제 50%, 성과 보상 30%다. 스웨덴은 행위별수가제 5~10%, 인두제 90%, 성과 보상은 0~5%다. 이제라도, 이를 참고삼아 지속 가능한 한국형 선진 의료체계를 개척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