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화요경제 항산항심] AI 이후, 살아남는 전문가의 조건

안병민 열린비즈랩 대표·‘질문인간’ 저자

  • 안병민 열린비즈랩 대표·‘질문인간’ 저자
  •  |   입력 : 2026-06-01 19:31:14
  •  |   본지 18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오래된 철물점이 있다. 천장까지 닿는 서랍장 안에는 크고 작은 나사와 각종 부품이 빼곡히 들어 있다. 주인은 그 위치를 모두 기억했다. 손님이 망가진 부품 조각을 들고 오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서랍을 열었다. 틀림없이 그 부품이 나왔다. 동네 사람들은 그를 장인이라 불렀다.

어느 날 가게에 재고 스캐너가 들어왔다. 부품 사진을 찍자 서랍 번호가 바로 떴다. 주인의 권위가 흔들렸다. 사람들은 그제야 알았다. 그동안 장인의 힘이라 믿었던 것 중 상당 부분이, 단순히 수많은 서랍들 속 부품 위치를 기억하는 능력이었다는 것을. 서랍을 찾는 능력은 기계로 대체된다. 하지만 부품이 왜 망가졌는지, 어떤 대체품을 써야 하는지, 손님의 현장 조건이 어떤지는 다른 문제다. 같은 나사라도 들어갈 자리가 다르다. 같은 부품이라도 버텨야 할 무게가 다르다. 기술은 장인을 밀어내지 않는다. 장인의 가치가 어디서 나오는지 다시 묻는다.

이제 같은 질문이 전문가를 향한다. AI가 뒤흔드는 것은 전문가의 직업이 아니다. 전문가라는 명함 위에 쌓인 권위의 근거다. 전문가의 정체성이다. 그간 전문가 권위의 대부분은 머릿속 서랍장에서 나왔다. 의사는 병명과 처방을 꺼냈다. 변호사는 법조문과 판례를 꺼냈다. 컨설턴트는 경영이론과 프레임워크를 꺼냈다. 전문가는 필요한 답의 위치를 정확히 알고, 빠르게 꺼내는 사람이었다. 정보의 비대칭. 그 차이가 곧 전문가의 몸값이었다.

AI는 이 격차를 빠르게 좁힌다. 증상과 검사 결과를 넣으면 의심 질환과 처방 후보가 뜬다. 사건 자료를 넣으면 조문과 판례가 정리된다. 기업 데이터를 넣으면 분석틀과 보고서 초안이 만들어진다. 높은 선반 위에 잠겼던 지식이 이제 화면에 바로 뜬다. 무너지는 것은 ‘정답형 전문성’이다. 정답형 전문성이 뭐냐고? 이미 존재하는 답을 기억하고, 그 답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필요한 순간 빠르게 꺼내 적용하는 능력이다. 문제의 기준을 세우기보다 주어진 질문에 맞는 답을 찾아내는 능력이다. 오랫동안 전문가의 높은 몸값을 지탱해온 능력이다. 데이터가 충분하고 피드백이 뚜렷한 영역에서는 기계가 더 빠르다. 더 정확하다. 지치지도 않는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무엇을 물을지, 무엇을 버릴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할지다.

회의실 풍경도 바뀐다. 과거의 전문가? 매끄러운 답을 내놓는 사람이었다. 오늘의 전문가는 질문의 구조를 바꾸는 사람이다.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무엇이 잡음인지 가려낸다. 주어진 질문의 전제를 다시 묻는다. 숫자 뒤의 현장 맥락을 읽는다. AI가 제시한 답이 어떤 비용과 책임을 낳을지 따진다. AI는 승소 확률을 계산한다. 하지만 전 재산을 건 의뢰인에게 소송을 접자고 말하는 일은 계산이 아니다. AI는 치료 가능성을 예측한다. 하지만 절망에 빠진 환자와 가족 앞에서 치료 중단을 논의하는 일은 예측이 아니다. AI는 감원 효과를 시뮬레이션한다. 하지만 누군가의 일을 멈추고 그 후폭풍을 감당하는 일은 단순한 시뮬레이션이 아니다.

판단은 그래서, 패턴 계산보다 무겁다. 판단에는 늘 결과가 따라 붙어서다. 누군가에게는 비용이 발생하고, 누군가에게는 설명이 필요하다. 그래서 진짜 전문성은 정답을 많이 아는 능력이 아니다. 불완전한 정보 속에서 기준을 세우고, 선택의 비용을 설명하고, 실패했을 때 도망가지 않는 태도다.

AI 이후의 전문가는 세 가지로 살아남는다. 첫째, 문제를 다시 정의하는 힘이다. 둘째, 맥락을 읽고 기준을 세우는 힘이다. 셋째, 결정의 결과를 설명하고 감당하는 힘이다. 이름하여 ‘책임형 전문성’이다. 이 세 가지가 없으면 전문가는 AI보다 느린 검색창일 뿐.

다시 철물점으로 돌아가 보자. 스캐너는 서랍 번호를 알려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품이 왜 부서졌는지, 같은 고장이 다시 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 손님이 정말 바꿔야 할 것이 부품인지 아니면 사용 방식인지는 스캐너가 알 수 없다. 살아남는 장인은 서랍을 빨리 찾는 사람이 아니다. 고장의 맥락을 읽는 사람이다. 살아남는 전문가도 다르지 않다. 끝내 물어야 할 질문을 붙들고, 맥락에 맞는 기준을 세우며, 그 답이 현실에 남길 무게를 오롯이 감당하는 사람이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오늘이슈

 많이 본 뉴스RSS

  1. 1[도청도설] if, 손아섭
  2. 2전국 언론인 청와대 앞 집결…“국제신문 대주주 엄벌” 촉구
  3. 3[포토에세이] 가을의 꽃 코스모스
  4. 4부산에 엔비디아 전용 생산라인 선다(종합)
  5. 5부산 재정자립도 1위 강서구, 생활임금 도입 나홀로 거부
  6. 6북극항로 개척자 “유빙·극한환경서 새 희망 봤다”
  7. 7되돌아와 수로 출구 앞에서 맴도는 부캉이
  8. 8공공 건설현장인데…추락 안전망 없고 감독 태만 부지기수
  9. 9[속보] 국정원 "김정은 사망설 허위" 국회 정보위에 보고
  10. 10부캉이 머물던 북항서 기름 유출…8시간째 모습 안 보여
  1. 1[속보] 국정원 "김정은 사망설 허위" 국회 정보위에 보고
  2. 2北 “국경선 확성기 외 새 대응수단 대기” 연일 대남 협박(종합)
  3. 3가덕 공사비 증액 ‘강제’ 아닌 ‘권고’…법개정 정부 초안 논란
  4. 4이 대통령, 최길수 특별감찰관 임명
  5. 5李대통령 지지율 소폭 상승해 40% 회복…부정평가는 50%
  6. 6최길수 특별감찰관 청문보고서 채택
  7. 7공소청 첫 국감 ‘李 공소 취소’ 공방…檢 총장 대행 “검토·지시 한 바 없어”
  8. 8‘남북 MDL 상호확인·군통신선 복원’ 정부, 군사회담 北에 제안
  9. 9김민석, 소방노조 만나 “정책·예산으로 안전·처우 개선” 약속
  10. 10금융위원장 "산은 부산 이전 하지 않는 것으로 정리" 파장
  1. 1부산에 엔비디아 전용 생산라인 선다(종합)
  2. 2북극항로 개척자 “유빙·극한환경서 새 희망 봤다”
  3. 3로그인 없이 서버장악 가능…전 세계 ‘PHP’ 보안 비상
  4. 4부산시대 연 HMM, 올해만 6조원 투자
  5. 5서낙동강 수변입지에 4Bay 구조…실속 갖춘 59㎡ 단일평형 차별화
  6. 6[한 손 뉴스] 낙상·실종 막는 ‘스마트신발’…부산TP, 노약자 지원 확대
  7. 7부산 온 인도 구자라트주 대표단, 지역기업과 조선·금융 협력 모색
  8. 8부산건설사·대기업, 상생협력 머리 맞댄다
  9. 9한은 기준금리 3% 동결…긴축 유지, 속도조절 속 내달 다시 인상 가능성(종합)
  10. 10한전, 개인정보 유출 1만1000명 추가 “조사 과정서 발견”
  1. 1전국 언론인 청와대 앞 집결…“국제신문 대주주 엄벌” 촉구
  2. 2부산 재정자립도 1위 강서구, 생활임금 도입 나홀로 거부
  3. 3되돌아와 수로 출구 앞에서 맴도는 부캉이
  4. 4공공 건설현장인데…추락 안전망 없고 감독 태만 부지기수
  5. 5부캉이 머물던 북항서 기름 유출…8시간째 모습 안 보여
  6. 6[속보] 여전히 수로 주변 배회하는 ‘부캉이’…“환경 적응하면 바다로 간다”
  7. 7“거제 양대 조선소와 상생 협의…남부내륙철도에 행정력 집중”
  8. 8[속보] '명태균 여론조사비 대납 의혹' 오세훈 2심 무죄
  9. 9오늘의 날씨- 2026년 10월 23일
  10. 10부산교통공사 노사, 파업 직전 잠정 합의…도시철도 정상 운행
  1. 1종합 6위 부산, 고른 활약에도 아쉬움
  2. 2만년 꼴찌 삼성 선두 ‘파란’…前 챔프 KCC 최하위 ‘수모’
  3. 3쇼트트랙 전설 최민정의 마지막 질주
  4. 4‘성폭행 의혹 제기’ 초교후배…기성용에 1억 배상해야
  5. 5‘높이’ 키운 BNK썸, 2년 전 영광 재현 노린다
  6. 6호랑이 발톱 세운 김도영…돌아온 사자 포효 최형우
  7. 7축구협회장 선거, 12월 18일 추진
  8. 8요트 하지민, 레이저급 정상…전국체전 16연패 역사 쓰다
  9. 9부산시설공단 여자핸드볼팀 전국체전 2년 연속 금메달
  10. 10마무리 캠프 코앞인데…롯데 감독·단장 인선 언제쯤
우리은행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학교 통폐합 지역 맞춤형으로 접근”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해운기업 유치, 해사법원 신설 “해양수도 부산 경쟁력 키울 것”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바흐를 찾아간 나, 한국을 꿈꾸는 그녀
세계유산위원회, 부산의 시간을 세계와 나누다
경제프리즘 [전체보기]
소비 아닌 문화 생산 주체 오페라하우스
한국 갯벌의 2단계 확대 등재 의미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진짜 질문의 시작
AI 시대, 부산 R&D의 대전환
국제칼럼 [전체보기]
원칙이 흔들린 대가
‘빵과 책’·양자경·강말금 그리고
기고 [전체보기]
‘2028 세계디자인수도 부산’의 과제
배의 피부를 지키는 기술은 도장이다
기자수첩 [전체보기]
금고 이사장 전횡, 지금도 진행중
엘리트 자평해온 市 공무원…생중계 회의서 능력 입증을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전체보기]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여름날의 애상, 왈츠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다대포에서 만난 퇴계 이황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AX·반도체 전시회 5개 동시에 열렸는데…
북극항로, 첫 배보다 중요한 것은 다음 배다
도청도설 [전체보기]
if, 손아섭
교육이라는 희망
독자 투고 [전체보기]
새로운 시작 ‘황혼 이혼’
무료 화장실 깨끗하게 쓰자
메디칼럼 [전체보기]
25년을 간직한 리플렛 세 장
요추부 척추관협착증, ‘메포츠’로 극복하기
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전체보기]
랜드마크 시스템의 시대
북항 돔구장에서 야구 보며 사우나를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건망증, 이렇게 잡자
운동으로 해마를 키우자
박진희의 컬처 픽 [전체보기]
‘부캉이’ 스펙터클에서 공존으로
부산 문화정책, 지금 필요한 선택
사설 [전체보기]
기초의회 의정비 증액, 합리적 기준이 필요하다
특별감찰관 부활, 임명보다 실질적 감찰이 중요하다
세상읽기 [전체보기]
‘이불 킥’의 순간에 도움 될 심리학 지식 한 스푼
문화예술의 시대
안재철의 연결하는 공간 [전체보기]
지구와 도시의 연결을 묻다
해양수도 부산, ‘제3의 경계 공간’
엄길청의 문전성시 [전체보기]
말과 현실이 너무 다른 부산
반도체와 부산
이보성의 미술 현장 산책 [전체보기]
두 미술관, 각자의 역할을 묻다
시장이 강해진 것일까, 비엔날레가 약해진 것일까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복지의 ‘필요 원칙’과 포퓰리즘
보건의료에서 지방정부 역할과 ‘정책 의료’
이정구의 맛과 건강 [전체보기]
미식과 오래 씹기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광복 81년, 다음은 바다의 산업 주권
HMM 부산 이전, 해양수도의 시험대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대규모 대미 투자, 기회인가 위협인가
국제질서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성장경로
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전체보기]
부산 아파트 10년, 이중 양극화와 위상 추락
미분양의 경고, 지방 맞춤 ‘출구전략’ 서둘러야
주재민의 명당을 찾아서 [전체보기]
사람은 갔어도 명당은 남아 있다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문도 묘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추석의 식탁, 가족을 잇는 와인
오스트리아 와인,빈의 시간을 마시다
특별기고 [전체보기]
‘해양수도 부산’ 토대부터 바로 놓아야
당론 따를지 역사 따를지 양심의 선택을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박자와 기보
국민악파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이대원의 ‘온정리 풍경’
유영국의 1957년 작 ‘사람’
CEO 칼럼 [전체보기]
청년 떠나는 지방, 수도권 인구 분산해야
거울 속의 외계인
  • 국제신문 골프대회
  • 맘편한 부산
  • 부산국제마라톤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