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적십자병원은 2년 전 영상의학과 전문의 채용에 연봉 4억5000만 원을 걸었다. 그러나 지원자가 없어 5억 원으로 올린 후에야 겨우 성공했다. 전남 목포시의료원이 정형외과 의사를 구하는데 내건 조건은 연봉 6억2000만 원이었다. 사람들이 ‘억’ 소리 나는 의사 몸값에 욕을 하면서도 “이러니 공부 열심히 해서 의사 되겠다고 난리 아니냐”고 한편으론 수긍한다.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한의사 등 다른 전문직도 연 평균 1억~2억 원 소득을 올린다. 하지만 최근 우리 사회의 직업 지형이 단번에 뒤바뀌는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초봉이 연 5500만 원(2025년 기준)이다. 임직원 평균 연봉은 삼성전자 1억5800만 원, SK하이닉스 1억8500만 원이다. 이 정도만 해도 웬만한 전문직 못지 않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삼성전자는 최근 타결된 임금협상에 따라 1인당 평균 6억 원을 성과급으로 받는다. SK하이닉스는 7억 원대다. 반도체 슈퍼 사이클 덕분에 회사 매출은 올해보다 내년, 내년보다 내후년에 더 많으리라는 전망이 있다. 연차가 있으면 연봉 10억 원도 어렵지 않다는 계산이다. 삼전 혹은 하이닉스 사내 커플이 최소 3년간 월급으로 올릴 수익은 세전 60억 원 이상이다. “로또 당첨보다 낫다”가 괜한 말이 아니다.
고려대 연세대 서강대 한양대 등에 있는 반도체 계약학과는 몇년 전만 해도 수능 2, 3등급이면 무난히 입학이 가능했다. 그러나 지난해부터 이들 학과는 그야말로 박이 터진다. ‘의치한약수(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 수의대)’가 아니라 반도체를 제일 먼저 앞세운 ‘반의치한약수’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이공계 학생을 키우는 영재학교 경쟁률마저 최고치를 찍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지난 주 한 강연에서 “AI 시대에는 수학자가 의사보다 훨씬 더 돈을 많이 버는 환경이 올 수 있다”며 “공대와 과학기술 분야 역시 매력적인 선택지가 되도록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산업화 도시화 초기 인기 있던 직업이 사라지거나, 당시엔 주목받지 못하던 일이 새롭게 부상하는 경우를 적잖이 본다. 어느 쪽이든 ‘상전(桑田)’이 ‘벽해(碧海)’ 되는데 최소 한 세대는 걸린다는 게 그간 통념이었다. 요즘은 다르다. 한국은행은 AI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면 가장 취약한 직종으로 의사 한의사 회계사 변호사 등을 꼽은 적이 있다. 한국 사회의 전통적 전문직이 AI로 대체되기 전에 그저 AI발 반도체 수요 폭발만으로 소득이 생산직에 밀리는 상황이 먼저 오고야 말았다.
강필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