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부산메디클럽

[박진희의 컬처 픽] 지독한 집념이 세운 로컬 자산, 대한도기

  • 박진희 미술평론가·더마루아트 대표
  •  |   입력 : 2026-05-28 19:07:20
  •  |   본지 22면
  • 글자 크기 
  • 글씨 크게
  • 글씨 작게
한국전쟁기에 제작된 변관식의 핸드페인팅 접시. 최정근 소장·이현주 제공
하얀 도자기 접시에 마치 막 잡은 듯한 도미와 파, 고동 정물이 화려한 색채와 세밀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마치 싱싱한 매운탕거리를 접시 위에 올려둔 것 같은 흥미로운 화면이다. 이 도자기의 작가는 바로 금강산을 그리던 한국 근대 동양화의 거장 변관식(1899~1976)이다. 금강산의 웅혼한 산세를 화폭에 담아오던 화가가 일상 식재료를 정물화로 그려낸 장면은 의외이면서도 신선하다. 이 실험은 1950년대 한국전쟁기 피란수도였던 부산의 도자기 공장 대한도기 안에서 탄생했다. 전쟁 통에 이렇게 파격적인 작품이 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전쟁기 부산을 힘겨웠던 피란민의 도시로 기억한다. 하지만 부산은 전국의 예술가와 문인, 지식인들이 피란을 와 문화를 피워낸 예술도시이기도 했다. 전쟁의 절망 속에서도 예술은 멈추지 않았으며, 항구와 시장, 다방을 떠돌며 예술가들은 작품 제작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동시에 서구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열망도 뜨거웠다. 이렇듯 부산에서는 문화예술의 다양한 장르가 뒤섞이며 실험과 도전이 이어졌다. 실경산수화를 그리던 변관식의 작품에 파격이 담긴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변관식은 대한도기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며 생계를 꾸렸고, 1953년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를 통해 피란 예술가들의 치열한 창작 의지와 부산과의 특별한 인연을 엿볼 수 있다.

대한도기는 지금은 사라진 영도의 도자기 공장이다. 이곳은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온 예술가들을 고용하며 생계를 지켜준 후원자 역할을 했다. 김은호 변관식 김학수 장우성 박노수 황염수 같은 피란 예술가들이 머물렀고, 김환기와 이중섭 역시 대한도기를 오갔던 정황이 확인된다. 장식품으로 제작되는 특성상 대부분의 작가는 서명을 남기지 않았지만 작품 곳곳에는 화가들만의 독특한 화풍이 배어 나온다. 대한도기는 산업과 예술, 생존과 실험이 공존한 공간이었으며, 핸드페인팅 도자기는 피란 예술가들을 포용하고 존중한 부산이 남긴 소중한 예술자산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멋진 로컬 콘텐츠가 거창한 기관 프로젝트가 아니라 한 연구자의 오랜 집념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미술사학자 이현주는 20여 년 전 한 사찰 입구에서 절을 지키던 개의 밥그릇을 우연히 발견했다. 하얗고 투박한 그릇 바닥에 적힌 ‘한도’라는 글자를 전직 문화재 감정위원이었던 그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개밥그릇의 마크가 바로 잊혔던 대한도기였고, 그 우연한 발견이 연구의 첫걸음이 되었다.

그는 2004년부터 전국의 개인 소장가들과 자료를 찾아다녔다. 그릇에 담긴 제작 시기와 작가를 고증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릇을 만든 노동자와 관련자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까지 함께 복원해 나갔다. 이 노력은 2010년 첫 논문 발표를 거쳐 최근 20년 연구를 집대성한 책 ‘대한도기 : 산업과 예술의 조우’로 값진 결실을 맺었다.

대한도기의 문화예술적 가치를 알리는 노력도 꾸준히 이어졌다. 2017년 부산근대역사관 특별전 ‘그릇으로 보는 부산의 근현대’, 2018년 부산시립미술관 전시 ‘피란수도 부산, 절망 속에 핀 꽃’, 영도문화원의 ‘대한도기 흔적 찾기’ 사업, 그리고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콜로키움 ‘피란수도 부산, 이산과 상실 속에 피어난 기억의 마중물 대한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관과의 협업이 이어졌다. 특히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대한도기가 주목받았다는 사실은 부산의 로컬 콘텐츠가 지역의 기억을 넘어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대변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전쟁 시기 대한도기의 도자기들은 미군과 외국인들이 기념품으로 구매하면서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부산에 머문 예술가들의 창작 정신과 한국 도자기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도시의 문화정체성은 역사를 담은 오래된 공장, 시대의 기억을 담은 도자기, 그리고 그것을 알리려는 사람들의 노력 속에서 더욱 깊어진다. 대한도기는 산업과 예술, 전쟁의 기억과 예술가들의 고통과 도전의 서사를 모두 품은 가장 부산다운 보물이다. 이제 우리는 부산이 빚어낸 이 소중한 로컬의 힘을 더 오래, 더 멀리 빛나게 해야 한다.
ⓒ국제신문(www.kookje.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국제신문 뉴스레터
국제신문 네이버 뉴스스탠드 구독하기
국제신문 네이버 구독하기
뭐라노 뉴스

 많이 본 뉴스RSS

  1. 15배까지 뛴 불꽃축제 숙박료…지긋지긋한 ‘바가지’
  2. 2기장의 1/10…부산 북구 참전수당 월 2만 원 ‘서러운 대접’
  3. 3찜질방·호텔 빈대 출몰에 화들짝…관광도시 부산 이미지 훼손 우려
  4. 4‘부캉이’ 보낸다…29일 선박·워터펌프로 외해 유도(종합)
  5. 5은행점포 영업시간 30분 단축…내년 4월부터 9시30분 개점(종합)
  6. 6기장 일대 동해남부선 폐선 부지 본격 활용 가능해져
  7. 7에코델타시티 마을버스…강서 17년 만에 새 노선
  8. 8헤어질 시간…부산 북항 상어 ‘부캉이’ 구조작전 시작
  9. 9“보조금 심의 결정권자는 나” 부산 중구 부구청장 논란
  10. 10부산서 하루 더…오버나잇 크루즈 성황
  1. 1김도읍 "청와대 가덕도신공항 공사비 증액 '선 계약, 후 특별법 반영'으로 결론
  2. 2“BPA, 1년간 1조원대 채권 발행…항만공사 통폐합 강행 땐 빚 전가”
  3. 3靑 “北포로 비공개 합의 부인 강력 유감” 우크라에 사과 요구(종합)
  4. 4“피지컬AI 항만 실증사업, 광양항 아닌 부산항서 해야”
  5. 5[속보] 강신철 국방장관 “매설지뢰, 北 국경선 요새화 관련 추정”
  6. 6李 지지율 2주째 상승 37.9%…양당 지지도 오차범위 접전
  7. 7여야 만난 강신철 국방부 장관 “北 지뢰 확인 땐 상응 조치…은폐 없다”(종합)
  8. 86·3 지방선거 신규당선자 평균재산 13.5억…광역단체장 중 김상욱 50억 최다
  9. 9靑 “DMZ 지뢰사고 현장조사 순전히 군사적 판단…李대통령 유엔 연설 무관”
  10. 10[뭐라노] 이재명 대통령의 시간
  1. 1은행점포 영업시간 30분 단축…내년 4월부터 9시30분 개점(종합)
  2. 2기장 일대 동해남부선 폐선 부지 본격 활용 가능해져
  3. 3부산서 하루 더…오버나잇 크루즈 성황
  4. 4HJ중공업 조선업계 첫 올해 임단협 타결
  5. 5안주고 덜준 보험금, 5년간 1000건 육박
  6. 6올해 2분기 부산 경제 2.3% 증가…'12% 급증' 충북의 5분의 1
  7. 7경영난 삼정기업·삼정이앤시 회생계획 인가
  8. 8구멍 뚫린 실업급여…3차례 이상 반복수급 11만명에 6000억 지급
  9. 9'맵리스' 자율주행 휴머노이드 로봇 상용화 시동...이동 조작 하나로
  10. 10부산 유주택 신혼 반토막…‘6억 초과’ 보유는 2.5배 급증(종합)
  1. 15배까지 뛴 불꽃축제 숙박료…지긋지긋한 ‘바가지’
  2. 2기장의 1/10…부산 북구 참전수당 월 2만 원 ‘서러운 대접’
  3. 3찜질방·호텔 빈대 출몰에 화들짝…관광도시 부산 이미지 훼손 우려
  4. 4‘부캉이’ 보낸다…29일 선박·워터펌프로 외해 유도(종합)
  5. 5에코델타시티 마을버스…강서 17년 만에 새 노선
  6. 6헤어질 시간…부산 북항 상어 ‘부캉이’ 구조작전 시작
  7. 7“보조금 심의 결정권자는 나” 부산 중구 부구청장 논란
  8. 8약사 면허 빌려 28억 부당이득…환수 거부에 法 “토해내라” 쐐기
  9. 9공소시효 이틀 앞두고 세금 포탈 업자 송치…검·경 합동수사 빛 발해
  10. 10거창한마당대축제 내달 1~4일 개최…가을 거창 매력 한자리에
  1. 1큰 日날 뻔한 韓야구…日 아마추어 상대로 3-1 설욕전
  2. 2중국에 두 번 진 이민성호, 이번엔 벼른다
  3. 3큰 日낸 女핸드볼…결승서 일본 꺾고 8년 만에 우승
  4. 4수영·탁구·사격 부진…양궁이 ‘금빛 갈증’ 풀어줄까
  5. 5‘세계 최강’ 안세영, 배드민턴 女단식 금메달…아시안게임 첫 2연패
  6. 6이소희·백하나 배드민턴 女 복식 24년 만에 금빛 스매시
  7. 7오상욱 끝냈다…펜싱 男 단체 우승…승마 남동헌, 12년 만에 정상 탈환(종합)
  8. 8안세영, 천위페이도 가볍게 압승…결승 진출
  9. 9K-농구 황금시대…남녀 동반 우승, 3대3도 첫 金(종합)
  10. 10이강인·황인범 활용법 찾아라
우리은행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학교 통폐합 지역 맞춤형으로 접근”
10대 부산시의회 상임위 들여다보기
해운기업 유치, 해사법원 신설 “해양수도 부산 경쟁력 키울 것”
강동진의 도시이야기 [전체보기]
바흐를 찾아간 나, 한국을 꿈꾸는 그녀
세계유산위원회, 부산의 시간을 세계와 나누다
경제프리즘 [전체보기]
소비 아닌 문화 생산 주체 오페라하우스
한국 갯벌의 2단계 확대 등재 의미
과학에세이 [전체보기]
‘인공지능 정렬’ 골든타임 놓치지 말라
자동화의 세상에서 지능화의 세계로
국제칼럼 [전체보기]
개헌 말하려면 헌법 준수부터
나림 이병주, 더 일찍 법(法)으로 통(通)했다
기고 [전체보기]
상어가 떠난 뒤, 북항에 남겨야 할 것
존엄 보장하는 부산형 청년보장제 되기를
기자수첩 [전체보기]
금고 이사장 전횡, 지금도 진행중
엘리트 자평해온 市 공무원…생중계 회의서 능력 입증을
김준희의 클래식 인사이트 [전체보기]
여름의 끝자락, 브람스
여름날의 애상, 왈츠
김지윤의 우리음악 이야기 [전체보기]
세종시대 음악이 전해진 이유
영산회상, 불교음악에서 풍류음악으로
뉴스와 현장 [전체보기]
솔직할 수 있는 용기, 당신에게도 닿기를
히말라야의 경고
도청도설 [전체보기]
병역 혜택, 야구는 빼자
AI 설계 어선
독자 투고 [전체보기]
새로운 시작 ‘황혼 이혼’
무료 화장실 깨끗하게 쓰자
메디칼럼 [전체보기]
‘공동선(Common Good)’으로서 간병 복지
직업병에 대한 자세, 무지와 고의 사이
목지수의 도시브랜드 산책 [전체보기]
랜드마크 시스템의 시대
북항 돔구장에서 야구 보며 사우나를
박지욱의 뇌력이 매력 [전체보기]
건망증, 이렇게 잡자
운동으로 해마를 키우자
박진희의 컬처 픽 [전체보기]
부산 문화정책, 지금 필요한 선택
지독한 집념이 세운 로컬 자산, 대한도기
사설 [전체보기]
부산불꽃축제 숙박료 폭등, 실효성 있는 대책 없나
지역기업 발목 잡는 획일적 세제, 현실에 맞춰야
세상읽기 [전체보기]
인공지능(AI)과 인류 멸종
북항 찾은 상어 ‘부캉이’와 잊힌 갈매기 ‘부기’
안재철의 연결하는 공간 [전체보기]
지구와 도시의 연결을 묻다
해양수도 부산, ‘제3의 경계 공간’
엄길청의 문전성시 [전체보기]
말과 현실이 너무 다른 부산
반도체와 부산
이보성의 미술 현장 산책 [전체보기]
시장이 강해진 것일까, 비엔날레가 약해진 것일까
아트부산, 숫자 이후의 질문
이상이 칼럼 [전체보기]
보건의료에서 지방정부 역할과 ‘정책 의료’
행위별수가제와 인두제, 오해와 진실
이정구의 맛과 건강 [전체보기]
미식과 오래 씹기
이제명의 오션 드림 [전체보기]
광복 81년, 다음은 바다의 산업 주권
HMM 부산 이전, 해양수도의 시험대
이홍의 세상현미경 [전체보기]
국제질서의 지각변동과 한국의 성장경로
한국이 가진 자산
정쾌호의 부동산 탐구생활 [전체보기]
미분양의 경고, 지방 맞춤 ‘출구전략’ 서둘러야
6·3 부산시장 선거, 부동산 정책의 길
주재민의 명당을 찾아서 [전체보기]
조선 8대 명당 중 하나인 정문도 묘
금가락지가 땅에 떨어진 형국, 곡전재
최태호의 와인 한 잔 [전체보기]
추석의 식탁, 가족을 잇는 와인
오스트리아 와인,빈의 시간을 마시다
특별기고 [전체보기]
‘해양수도 부산’ 토대부터 바로 놓아야
당론 따를지 역사 따를지 양심의 선택을
하순봉의 음악이야기 [전체보기]
박자와 기보
국민악파
황정수의 그림산책 [전체보기]
이대원의 ‘온정리 풍경’
유영국의 1957년 작 ‘사람’
CEO 칼럼 [전체보기]
무(武)
의료 전문성이 병원 밖 나가는 길 열어야
  • 2026 국제환경에너지산업전
  • 국제골프아카데미
  • 부산국제마라톤
  • 어린이청소년경제아카데미
  • BNK생명나눔챌린지
  • 유콘서트
걷고 싶은 부산 그린워킹 홈페이지
국제신문 대관안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