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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기에 제작된 변관식의 핸드페인팅 접시. 최정근 소장·이현주 제공 |
하얀 도자기 접시에 마치 막 잡은 듯한 도미와 파, 고동 정물이 화려한 색채와 세밀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마치 싱싱한 매운탕거리를 접시 위에 올려둔 것 같은 흥미로운 화면이다. 이 도자기의 작가는 바로 금강산을 그리던 한국 근대 동양화의 거장 변관식(1899~1976)이다. 금강산의 웅혼한 산세를 화폭에 담아오던 화가가 일상 식재료를 정물화로 그려낸 장면은 의외이면서도 신선하다. 이 실험은 1950년대 한국전쟁기 피란수도였던 부산의 도자기 공장 대한도기 안에서 탄생했다. 전쟁 통에 이렇게 파격적인 작품이 탄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전쟁기 부산을 힘겨웠던 피란민의 도시로 기억한다. 하지만 부산은 전국의 예술가와 문인, 지식인들이 피란을 와 문화를 피워낸 예술도시이기도 했다. 전쟁의 절망 속에서도 예술은 멈추지 않았으며, 항구와 시장, 다방을 떠돌며 예술가들은 작품 제작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동시에 서구의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열망도 뜨거웠다. 이렇듯 부산에서는 문화예술의 다양한 장르가 뒤섞이며 실험과 도전이 이어졌다. 실경산수화를 그리던 변관식의 작품에 파격이 담긴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변관식은 대한도기에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며 생계를 꾸렸고, 1953년 부산 국제구락부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를 통해 피란 예술가들의 치열한 창작 의지와 부산과의 특별한 인연을 엿볼 수 있다.
대한도기는 지금은 사라진 영도의 도자기 공장이다. 이곳은 전쟁을 피해 부산으로 내려온 예술가들을 고용하며 생계를 지켜준 후원자 역할을 했다. 김은호 변관식 김학수 장우성 박노수 황염수 같은 피란 예술가들이 머물렀고, 김환기와 이중섭 역시 대한도기를 오갔던 정황이 확인된다. 장식품으로 제작되는 특성상 대부분의 작가는 서명을 남기지 않았지만 작품 곳곳에는 화가들만의 독특한 화풍이 배어 나온다. 대한도기는 산업과 예술, 생존과 실험이 공존한 공간이었으며, 핸드페인팅 도자기는 피란 예술가들을 포용하고 존중한 부산이 남긴 소중한 예술자산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멋진 로컬 콘텐츠가 거창한 기관 프로젝트가 아니라 한 연구자의 오랜 집념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이다. 미술사학자 이현주는 20여 년 전 한 사찰 입구에서 절을 지키던 개의 밥그릇을 우연히 발견했다. 하얗고 투박한 그릇 바닥에 적힌 ‘한도’라는 글자를 전직 문화재 감정위원이었던 그의 눈은 놓치지 않았다. 개밥그릇의 마크가 바로 잊혔던 대한도기였고, 그 우연한 발견이 연구의 첫걸음이 되었다.
그는 2004년부터 전국의 개인 소장가들과 자료를 찾아다녔다. 그릇에 담긴 제작 시기와 작가를 고증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릇을 만든 노동자와 관련자들, 그리고 사람들의 기억까지 함께 복원해 나갔다. 이 노력은 2010년 첫 논문 발표를 거쳐 최근 20년 연구를 집대성한 책 ‘대한도기 : 산업과 예술의 조우’로 값진 결실을 맺었다.
대한도기의 문화예술적 가치를 알리는 노력도 꾸준히 이어졌다. 2017년 부산근대역사관 특별전 ‘그릇으로 보는 부산의 근현대’, 2018년 부산시립미술관 전시 ‘피란수도 부산, 절망 속에 핀 꽃’, 영도문화원의 ‘대한도기 흔적 찾기’ 사업, 그리고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열린 콜로키움 ‘피란수도 부산, 이산과 상실 속에 피어난 기억의 마중물 대한도기’에 이르기까지 여러 기관과의 협업이 이어졌다. 특히 서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서 대한도기가 주목받았다는 사실은 부산의 로컬 콘텐츠가 지역의 기억을 넘어 대한민국 근현대사를 대변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한국전쟁 시기 대한도기의 도자기들은 미군과 외국인들이 기념품으로 구매하면서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그들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부산에 머문 예술가들의 창작 정신과 한국 도자기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다.
도시의 문화정체성은 역사를 담은 오래된 공장, 시대의 기억을 담은 도자기, 그리고 그것을 알리려는 사람들의 노력 속에서 더욱 깊어진다. 대한도기는 산업과 예술, 전쟁의 기억과 예술가들의 고통과 도전의 서사를 모두 품은 가장 부산다운 보물이다. 이제 우리는 부산이 빚어낸 이 소중한 로컬의 힘을 더 오래, 더 멀리 빛나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