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민호 감독의 영화 ‘남산의 부장들’은 1979년 10·26 사태막전막후를 긴박하게 풀어낸 수작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과 미국으로부터 ‘독재를 끝내고 물러나라’는 이중 압박을 받으며 코너에 몰린 상황이었다.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의 목소리가 가장 컸던 곳이 바로 이곳 부산과 경남 마산이었다. 10·26 열흘 전인 16일부터 20일까지 부산과 마산지역 학생과 시민은 유신 체제에 반대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부마민주항쟁이다. 김영삼 신민당 총재가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미국이 박 정권에 대한 지지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당하자, 그의 정치적 고향이었던 부산과 경남에서 ‘유신 철폐’ ‘독재 타도’ 민심이 폭발한 것이다.
부산대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10·16 부마항쟁은 10·26 사태로 직결되는데, 영화에서 그 과정이 생생하게 다뤄진다. 부산 마산에서의 시위를 두고 대통령 경호실장 차지철(극중 이름 곽상천)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도 희생시켰는데 우리가 100만, 200만 명 탱크로 밀어 버린다고 큰일 나겠냐”며 강경 진압을 부추겼고,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김규평)는 “시위대는 그냥 학생 시민이었다.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시라”고 만류했다. 박 대통령은 차지철 편을 들어 부산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그 결과 10·26 피살로 이어진다.
김재규는 사형 전 군사재판에서 “사태(부마항쟁)가 확산되었다면 정부의 강경 진압으로 수많은 국민이 희생되는 피의 대숙청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가 경고했던 대량 학살은 7개월 뒤 부산이 아닌 광주에서 현실화했다. 10·26 직후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전두환의 신군부는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고, 격렬히 저항한 광주를 본보기 삼아 ‘서울의 봄’ 등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짓밟는다. 부마항쟁과 5·18은 강경 진압됐지만 1987년 6월 항쟁으로 이어져 대한민국 민주화 완성의 초석을 다졌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꺾이지 않는 민주화를 향한 염원,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국민주권의 상징인 부마항쟁과 5·18. 이들 정신을 헌법 전문에 넣고자 한 개헌 시도가 최근 좌절됐다. 개헌안은 지난 7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됐으나, 국민의힘 의원 전원이 표결에 불참하면서 투표가 성립되지 못했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로 만들어진 현행 헌법을 39년 만에 바꾸려는 개헌 시도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현행 헌법 전문은 4·19 혁명까지만 서술한다. 이번 개헌 시도는 부마와 5·18 정신을 추가, 단절된 역사의 고리를 이음으로써 민주화를 위한 시민 투쟁의 역사적 맥락과 계승 과정을 온전히 복원하려는 취지로 진행됐다. 개헌이 성사됐다면 우리 고장의 정신이 헌법 전문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역사적 이정표가 될 수 있었으나 불발돼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개헌이 좌절되는 사이 5·18과 6월 항쟁 등 민주화 정신을 희화화하거나 모독하는 혐오는 극에 달했다. 국힘 송언석 원내대표는 5·18 기념식에 “더러워서 안 간다”고 말해 구설수에 올랐다. 스타벅스 코리아는 5·18 기념일에 맞춰 ‘책상에 탁’ ‘탱크데이’ 이벤트를 열었다가 거센 역풍을 맞았다. 탱크는 5·18 광주를 짓밟은 계엄군을, 책상에 탁은 6월 항쟁을 촉발시킨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을 연상케 한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대표이사도 경질했지만 불매운동 등 반발은 사그라들지 않는다. 이런 와중에 국힘 장동혁 대표는 “스타벅스 커피 들고 투표장으로 가자”며 논란에 불을 질렀고, 박 열사의 고향인 부산에서도 한 카페가 ‘테이블에 탁, 탱크시계 차고’ 게시글을 올려 온라인을 시끄럽게 하는 등 조롱이 이어졌다.
이번 파장은 부마항쟁과 5·18을 헌법 전문에 새기는 개헌이 왜 시급한지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기본 가치와 정체성을 규정하는 국가 최고 규범 전문에 이들 민주화 운동이 명시되면 헌법을 부정하는 역사 왜곡이나 부정, 폄훼가 준동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은 불가침이며, 국가권력은 이를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진다’는 내용의 독일 헌법 1조는 나치 시대 인권 유린에 대한 통절한 자성에서 비롯됐다. 우리도 부마항쟁과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 대한민국 헌법 1조 ‘민주공화국’과 ‘국민주권’의 가치를 강조하는 동시에 국가폭력이 남긴 과오를 반성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8일 광주에서 열린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에서 “5·18 정신이 헌법 전문에 수록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개헌을 향한 발걸음은 계속되어야 한다. 2년 뒤 국회의원 총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가 병행되도록 여야는 초당적 협의를 지금부터 재개해야 한다. 특히 이번에 지역 정신의 헌법 수록을 거부하는 데 동조한 국힘 소속 부산 경남 국회의원들을 시민은 똑똑이 기억하고, 앞으로의 방향타 전환도 지켜볼 것이다.
이선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