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키우면 뭐가 좋아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여섯 마리의 고양이와 함께 한 10년을 돌아본다. 남에게 자랑할 만큼 행복한 시간이나 기쁜 순간이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눈에 염증이 차거나 피부병으로 털이 빠진 새끼 길고양이가 우리 가족의 품 안에서 건강한 모습이 될 때는 뿌듯함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수고로움과 치료비까지 좋지는 않았다. 바퀴벌레를 잡아 내 머리맡에 선물로 두던 고양이를 ‘고양이 별’로 보내며 겪은 슬픔도 좋을 수가 없다. 생각은 길어지고 답은 끝내 얼버무리고 만다.
얼마 전, 이 난제에 대한 나름의 답을 뜻밖의 곳에서 찾았다. ‘모든 언어를 꽃피게 하라’는 책을 읽다 한 문장에 오랫동안 시선이 붙들렸다. 작가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이 자신이 만든 영어 사전에서 사전 편찬자(Lexicographer)를 풀이하며 내린 정의, “… 단조롭고 고된 일을 하는 무해한 자”. 이 문장을 보는 순간, 깃펜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18세기 중반의 서재에 들어서는 기분이었다. 9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영어 사전의 기본 틀을 만든 이가 자신의 직업을 그저 ‘무해하다’고 표현하는 드높은 겸손함을 한참이나 올려다봤다. 동시에 ‘무해하다’는 말이 깊은 안온함을 품고 있다는 걸 처음으로 느꼈다.
우리는 무엇이든 우리에게 유익한지, 유익하다면 어느 정도인지 따지는 데 익숙하다. 어느 식당에 들어가도 우릴 가장 먼저 반기는 건, ‘혈액순환에 좋습니다’ ‘기력을 북돋습니다’ 등의 문구다. ‘먹어도 무해합니다’는 문구를 본다면 나부터도 께름칙할 것 같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난 초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금정산의 정기를 받아서 국가와 사회에 보탬이 되겠노라 노래 불렀다. 관계를 맺을 때, 나와 상대가 주고받을 이익을 천칭 저울의 양편에 올리는 법을 배웠고 가르쳤다. 그러다 보니 오랫동안 ‘무해하다’ ‘무익하다’를 ‘무가치하다’와 동의어로 여겼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이익을 준다는 상품과 사람에게 숱하게 속았다. 최고 효율의 이익을 추구한 결과가 초래하는 붕괴와 침몰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반대로 이익을 주겠다, 자신 있게 내 입에서 나온 말들이 허망하게 흩어질 때도 많았다. 허언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이다. 다른 이에게 해를 입혔던 경우에 비하면. 들숨에는 날숨이 있고, 일어섬에는 앉음이 있듯, 유익하기만 한 건 세상에 도통 없다는 걸 조금씩 깨달았다. 온 세상 넘실대는 유익함에 멀미를 느끼다가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 조심하는 이들을 만나면 진정이 되었다. 층간소음이 있지 않은지 먼저 묻는 젊은 아빠, 시끌벅적한 관광지에서 현지인의 삶을 해치지 않는 여행을 내내 고민하던 푸른 눈의 노부부, 분리수거할 곳을 찾을 때까지 무거운 배낭에 쓰레기봉투를 달고 너덧 시간을 걷던 친구…. 언제부터인가 속으로 이 한마디를 되뇔 때가 늘었다. 해만 끼치지 말자. 내가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에게, 조금 욕심을 부려 날 스쳐 지나는 이들에게. 하지만 유익한 존재가 되는 것만큼, 아니 몇 곱절 더 무해함에 이르는 건 어렵다.
고양이는 대체로 경계심이 강하다. 큰 소리와 갑작스러운 움직임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우리 집 고양이는 내가 야구 중계를 볼 때는 절대 가까이 오지 않는다. 요즘처럼 롯데 자이언츠의 성적이 나쁠 때는 더더욱. 고양이들이 다가올 때는 내가 원고를 쓰거나 책이나 영화를 볼 때다. 고양이는 바위나 나무, 화장대나 식탁처럼 내가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 때만 내 무릎이나 가슴 위에 올라와 앉는다. 그러면 난 부드러운 등에 손을 얹는다. 그 순간은 아름다운 시구만큼이나 좋다. 촬영장에서 주운 길고양이를 키우는 PD와 며칠 전에 통화를 하며 사람과 고양이의 안부를 나눴다. 처음으로 고양이를 키우면 뭐가 좋은지 말할 수 있었다. 짧은 순간이나마 내가 ‘무해한 자’라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다고.
지금도 무릎 위에 치즈 고양이가 앉아 있다. 골골… 골골…. 이 골골송이 지금 내가 쓰는 글이 무해하다고 알려주는 것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