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때는 참 가기가 싫었다. 거리도 너무 멀었고, 내 일상과 생계가 너무 빠듯했던걸. 농땡이를 칠까 한참 고민하다가 울면서 간 적도 더러 있다. 그놈의 재미가 문제다. 영화도 배급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느낌 때문에 무턱대고 시작하고는 영화를 배급하는 일을 벌써 10년째 하고 있다. 이것도 마찬가지였다. 작년 이맘때부터 2주에 한 번, 그러다가 연말부터는 아마 거의 매주. 엉겁결에 모인 우리는, 일이 이렇게까지 길고 깊어질지 모른 채, 또 그렇게 가랑비에 옷 젖듯이 일 년 정도 정책 공부를 했다.
작년 4월 첫 포럼에서 부산의 영화인들이 각자의 고충을 이야기했고, 그날 누군가는 울었다. 부산에서 계속 동료들과 영화를 하고 싶다고. 지난 일 년은 아마 그 절실한 물결 하나하나를 모아서 하나의 흐름을 만들어 보려 했던 시간이었다. 제일 처음 한 일은 우리가 가진 막연한 느낌을 내려놓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국의 데이터를 조사해 영화의 현실을 진단해 보았다. 그런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경험을 덧대어 정책을 그리기 시작했다. 해외 사례를 뒤지고, 쓰고 지우고 다시 쓰고. 10년 뒤의 미래를 상상하면서 쓰고 지우고 다시 쓰다 보니 어느새 70쪽이 넘는 제안서가 됐다.
그런 보고서를 들고 동료들을 찾아다녔다. 그 중엔 감독과 피디도 있었고 정책을 시행하는 행정가, 영화제 등 기관의 실무자도,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와 이제 막 영화 현장을 경험하고 있는 대학생과 졸업생도 있었다. 가끔 영화제에서 스치듯 만난 인연도 붙잡고 연락을 돌렸는데, 1시간 반 정도의 긴 면담에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골방에서 보고서만 쓰다가 나와서 사람들을 만나니, 데이터 위에 숨결이 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들 바라는 것은 비슷했다. ‘계속 부산에서 살고 싶다.’ ‘영화 만들면서 먹고 살고 싶다.’ ‘혼자가 아니라 연결돼서 관객과 만나고 싶다.’.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지난 3월 27일에 마침내 마지막 포럼을 진행했다. 제안서의 초안을 공개하는 자리였다. 거기서 우리는 이런 10년 치의 꿈을 펼쳐놓았다. “세금 낼 돈으로 영화에 투자하면 세금을 깎아준다. 자국 영화의 위기를 시민이 투자하는 세제 혜택형 민간 펀드로 해결한 프랑스의 선순환 사례가 있다. 또 동네마다 상영관을 만드는 건 어떤가. 부산은 전국에서 인구 대비 극장 수가 16위로 매우 낮다. 학교 옆 폐교도 좋고, 공공 유휴 공간을 전환하는 것도 좋다. 영화도시에 산다는 것은 부산 어디에 살든 걸어서 다양한 영화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기생충’을 보고 사회 과목을 토론하며 이미지로 세상을 읽는 미래 세대로 자랄 것이다.”
‘자생가능한 영화 생태계 조성: 부산영화정책제안서’는 참으로 서툰 보고서다. 행정의 언어와 체계를 잘 모르는 현장 영화인이 숫자와 현실 사이를 오락가락하면서 고민한 결과니까. 그러니 영화인이 보면 어렵고, 행정가가 보면 허무맹랑할 테다. 그러나 단단한 보고서다. 카페를 운영하면서 배급을 하는 사람과 이제 막 아이의 아빠가 된 감독, 낮엔 회의하고 밤엔 편의점으로 출근하는 감독, 영화를 사랑하는 어떤 평론가, 동료 영화인들의 목소리를 보태어 만들어가기 때문이다.
배급하다 생계가 어려워져서 재작년에 카페를 열고, 그렇게 1년 반 동안 커피를 내리다 보니, 이제는 내가 영화계에 남아 있고 싶은 건지 잘 모르겠다. 그런 내가 영화 정책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건 솔직히 스스로도 좀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10년 전에도 지금도 내게 남아 있는 같은 질문이 하나 있다. ‘내가 살고 싶은 곳에서, 내가 하고 싶은 (영화)일을 하고, 사람들과 나누고, 그 과정에서 생계를 해결하며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일까?’ 처음의 설렘과 재미가 사라진 지금에도 이 이상한 프로젝트를 계속해 나가는 건, 아마 아직 이 질문을 포기하지 못해서일 것이다.
이미 다른 의미로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주역의 천화동인과 화천대유 괘는 말한다. 사사로움 없이 공정한 대동의 세상을 꿈꾸며 ‘들판’에서 동지를 규합하라. 처음에 외롭고 울부짖을지언정 용맹하게 나아가면 풍요가 있을 것이니, 태양의 모습을 본받아 그것을 구석구석 나누라고.(도올주역강해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