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변관식의 ‘금강산도’. |
한국미술사에서 금강산을 소재로 한 작품이 가장 많이 등장한 때는 일제강점기이다. 한국이 근대화되고 식민지화되는 과정에서 외국인들과 많은 일본인 화가가 방문하여 금강산을 그렸다. 특히 1924년 경원선 금강산역이 생긴 이후로는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화가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금강산을 찾았다. 그 수가 수천 명에 이른다. 또한 조선 후기 실경산수를 잇는 한국 근대 화가들이 전통적인 화풍을 계승하고, 이에 새로운 화풍을 더해 금강산 그리기를 좋아했다.
소정(小亭) 변관식(卞寬植, 1899-1976)은 한국인 화가들 중 가장 많은 금강산 그림을 그렸고 뛰어난 성과를 보였다. 변관식은 금강산 그림을 남긴 화원 조정규, 조석진으로 이어지는 외가 쪽 화업의 피를 이었고, 1925년에는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역시 금강산 그림을 남긴 신남화풍 화가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에게 새로운 화풍을 배웠다. 변관식은 금강산을 여러 차례 탐승한 후 이때 본 풍경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가 그린 삼선암 옥류동 만물상 등등 외금강, 내금강을 넘나드는 작품들은 자신만의 독특한 필법으로 금강산의 사계절 산세를 잘 표현했다.
근래에 변관식이 1934년에 금강산을 그린 여섯 폭 병풍 대작이 발견되어 화제다. 내금강에 자리한 보덕암을 중심에 두고 시야를 넓게 하여 주변 풍경을 그린 매우 규모가 큰 작품이다.
현전하는 변관식의 금강산 그림 가운데 매우 이른 시기의 것이다. 이런 대작을 그린 것도 경이로운데, 작품의 수준 또한 빼어나 그의 금강산에 대한 이해가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보통 1937년 무렵 본격적으로 금강산에 입산하여 명승을 사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그림을 통해 이미 금강산을 방문한 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낙관할 인장을 가져가지 않았던지 작가 인장을 찍지 않았다. 다행히 위편에 화가 정운면이 작품 제작에 대한 사연을 적어 내력을 알 수 있다. 변관식은 광주에 거주하던 화가 허백련과 친분이 두터워 자주 광주를 방문했다. 한동안은 전라도 지역에 머물며 친교를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 작품은 광주를 여행할 때 이 지역 유명 화가 정운면이 단골집인 광주 최초의 한식 요릿집 신광원으로 초대하였을 때 그린 것이다. 화제 내용을 보면 정운면이 술을 좋아하는 변관식을 이곳에 머무르게 하여 그리게 한 것으로 보인다.
현대 치수로 치면 300호가 넘는 큰 화면을 산으로 가득 채웠다. 이미 꽃은 져서 보이지 않고, 나뭇잎은 무성하고, 물이 많은 것으로 보아 여름 풍경이다. 정운면이 화제에서 금강산의 여름 이름인 봉래산이라 부른 것도 같은 이유다.
보통 변관식의 그림은 먹을 많이 쌓는 적묵으로 유명한데, 이 그림은 먹을 적게 쓰고 정밀한 묘사를 하고 연한 채색을 하였다.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벗어나 새로운 양식을 추구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높은 산을 앞으로 바짝 끌어들여 마치 보는 이가 산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봉우리 사이로 길이 있고, 운무가 끼어 있는 모습이 자연의 숨길 같다. 이곳저곳 길에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으나 거대한 자연에 묻혀 오로지 자연만 보인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보여주는 대단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