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술 전 부작용 미고지 및 이로 인해 발생한 수술 부작용이 있었지만 미흡한 대처로 의료과실 증빙 과정을 겪고 있다. 이미 과실 입증이 명확히 끝난 사안임에도 보험사는 행정적 절차를 이유로 의료자문동의서 서명을 요구했다. 자문 기관의 객관성이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요구되는 서명은 소비자에게 치명적인 독소 조항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해당 절차의 법적 근거와 필요성을 서면으로 명확히 밝혀달라고 요청했다. 이는 소비자가 지닌 정당한 권리이자, 시스템 투명성을 확인하고자 하는 최소한의 방어 기제였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이 합리적 소통과는 거리가 멀었다. 질문을 듣고 논리적으로 소명하는 대신 절차에 순응하지 않을 거라면 소송을 통하라는 식의 단정적인 응대가 돌아왔다. 질문의 본질을 시스템을 향한 도전으로 치부하고, 답변 의무를 권위에 기초한 통보로 대체하는 순간이었다. 설명하려 들지 않고 관성으로 대응하려는 이러한 태도는 대안 없는 이분법에 매몰된 우리 사회 단면을 고스란히 투영한다.
대화 핵심은 주장을 동적으로 주고받는 티키타카(Tiki-Taka)에 있다. 상대의 의문을 파악하고 다시 나의 논리를 정교하게 전달하는 과정이 소통의 기본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티키타카가 없다. 정확히는 티키타카를 시도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특히 정치와 이념의 영역에서 그 증상은 더욱 심각하다. 특정 정치인의 행보가 내 진영 논리에 부합하기만 하면 그 인물이 가진 치명적인 결함이나 공정성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된다. 반대로 상대 진영 주장이 아무리 합리적일지라도 “결국 저의가 의심된다”며 귀부터 닫는다. 내가 지지하는 논리에 맞춰 한쪽 눈을 가리는 태도는 이제 정체성 증명 수단처럼 굳어졌다.
논쟁이 사라지고 확증만 남은 시대, 사실관계의 무게보다 그 사실이 우리 편에게 유리한가라는 정치적 효용이 유일한 가치 척도가 되었다. 중간 지대가 사라진 사회에서 개인은 각자의 성벽 안에서 서로를 향해 날선 경계심을 내뿜는다.
양극화가 이토록 가속되는 주범은 우리 손 안의 알고리즘이다. 확증 편향을 강화하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세계에 유폐되었다. 디지털 플랫폼이 구축한 환경은 입맛에 맞는 정보만을 선별해 배달하며, 결코 타인 논리를 궁금해하지 않게 만든다. 모든 정보를 1분 남짓의 숏폼과 무한한 스크롤이 가능한 피드에서 소비하려는 태도는 결국 타인의 관점을 지우고 자신만의 편협한 세계관을 공고히 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타인 논리를 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 마음은 사회적 연대를 약화시키고 극단적인 적대감만을 남긴다. 갈등이 발생했을 때 이를 완충해 줄 대안적 사고나 유연한 논리가 부재할수록 맥락이 아닌 특정 어휘에 집착하는 소모전이 발생한다. 어떤 단어를 쓰면 그 진영이 틀림없다는 시선, 이런 단어를 썼으니 더 이상 대화는 무가치하다는 태도가 그렇다. 어휘에 천착한 논의는 확장될 수 없다. 알고리즘을 넓히기 위해 스스로 이것저것 눌러보아야 하듯, 단편적 정보에 매몰된 사고 역시 활자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야 해결할 수 있다. 텍스트를 탐독하며 깊게 사유하는 ‘근육’, 관점이 다른 여러 매체를 교차해서 읽으며 나의 세계관이 유일한 진리가 아님을 깨닫는 것만이 우리 사회가 들 수 있는 유일하고도 강력한 ‘보험’이다.
누군가 내 의견에 반대한다면 우선 “왜 아니냐”고 물어야 한다. 그것은 불신이 아니라 더 나은 합의를 향한 건강한 상호작용이다. 상대가 던지는 정당한 의문는 “또 아니냐”는 식 냉소나 질문하는 이를 ‘피곤한 사람’으로 치부하며 입을 막아서는 안 된다.
타당한 근거에 따라 구축된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야말로 획일화한 절벽으로 치닫는 이 사회를 멈춰 세울 마지막 제동 장치다. 끝까지 묻고 성실히 설명하는 태도만이 우리를 비로소 인간답게 만든다. 대화의 티키타카가 다시 살아날 때 우리는 비로소 공존의 광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선 들어야 한다. 그리고 읽어야 한다. 그 후 말하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