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개항도시 부산은 ‘글로벌’을 앞세울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을 갖춘 도시다. 부산이 주창하고 있는 ‘글로벌 허브도시(이하 글로벌 도시)’ 개념은 매우 옳고, 또 부산과 찰떡같이 어울린다. 앞으로 수십 년간 끌고 가야 할 부산 브랜딩의 핵심 소재임에 틀림없다. 사전적 의미로 글로벌 도시는 ‘세계의 경제·정치·문화·지식 네트워크의 핵심 노드(node)로 기능하는 도시’로 정의된다. 다만 모든 영역에서 최고가 될 필요는 없다. AI에게 전 세계의 글로벌 도시가 어디인지 물어보았다. 네 도시를 꼽는다. 뉴욕(금융·미디어·국제기구 중심), 런던(국제 금융·법률·외교 중심), 도쿄(동아시아 경제·기술 허브), 싱가포르(글로벌 항만·물류·금융 허브). 그리고 이 도시들의 공통점으로 “인구 규모보다 해당 분야와 관련된 국제 네트워크에서의 영향력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세계적인 사회과학자이자 커뮤니케이션 학자인 스페인의 마누엘 카스텔스는 글로벌 도시를 ‘흐름의 공간(space of flows)’으로 설명했다. 조선 시대 초량왜관이 있던 부산은 왜-한양-중국 간 은 거래의 중계무역지였고 조선통신사의 핵심 기착점이었다. 20세기에는 일제의 침략 목적 아래 태평양과 만주 대륙을 잇는 연결점이었으며, 한국전쟁기에는 피란수도에 연루된 국제협력과 구호 역사의 거점이었다. 오늘의 부산은 국제무역과 해상물류, 국제 네트워크 기반의 영화산업이 집적된 도시다. 부산은 분명 ‘흐름의 공간’이다. 다만 그 흐름을 확실하게 붙잡거나 정교하게 내면화시키질 못하고 있다. 흐름의 기회를 그냥 통과만 시키며, 잠시 잠시 이벤트를 통한 구호와 환상에 머문 채 재생산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AI가 꼽은 네 도시를 보더라도 글로벌의 주제는 각 도시의 역사, 사회적 속성, 지정학적 조건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진정한 글로벌은 흉내와 카피가 통하지 않는다. 자신의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글로벌 도시를 외치면서 외연의 규모나 바깥세상을 의식한다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 반드시 ‘남과 확연히 구분되는 특별함’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특별함은 ‘글로벌의 올곧은 시선’과 연결된다. 글로벌의 함정은 글로벌을 외치다 그만 지역과 시민의 삶을 지우는 것이다. 허상과 숫자를 앞세운 글로벌이 때때로 지역의 내면을 도외시하거나 비워버리는 과정이 되기도 한다. 글로벌을 주장하면 할수록 지역과 시민이 더 또렷하게 드러나야 한다. 어쩌면 상식에 가까운 이야기다.
부산은 분명 흐름의 도시였다. 부산포가 열린 15세기 이래 지금까지 부산은 끊임없이 외부 세계와 만나 왔다. 그러나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흐름은 부산의 힘으로 축적되고 있는가. 글로벌의 추진 전략과 개발 정책이 보통 시민을 위한 것인가. 글로벌 해양을 위한 정책은 지역 청년의 삶과 연결될 수 있는가. 무수한 국제행사와 이벤트가 도시의 지속적 역량으로 남는가. 이 질문들 앞에서 솔직할 수 있고 또 정확히 부산을 직시할 수 있다면, 부산의 글로벌에 큰 변화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더 큰 규모를 향한 경쟁이나 자본 집중만으로는 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부산이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개항 150년을 지나고 있는 부산에 가장 필요한 것은 글로벌이라는 수식어 자체가 아니라,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일지 모른다. 해양을 통해 스쳐 가는 세계 흐름을 지역의 기억과 정체성으로 재해석하여 다시 세계로 발신하는 능력, 전쟁과 피란의 기억을 평화와 인류애의 자산으로 전환하는 상상력, 물류산업항을 시민과 문화의 항구로 재구성하는 창의성 등이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런 고민의 결과가 부산만이 가질 수 있는 글로벌의 주제이지 않을까 싶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자. 첫째, ‘해양 네트워크의 시민화’다. 항만과 물류가 도시의 외곽 산업으로 머무는 것이 아닌, 북항과 원도심, 산업과 문화, 일자리와 생활권이 연결되는 역동적인 구조로 재편되어야 한다. 해양 글로벌 도시는 물동량의 규모가 아니라 시민 삶 속에서 체감될 때 비로소 힘을 갖기 때문이다. 둘째, ‘기억 자산의 세계화’다. 피란수도의 평화와 인류애에 대한 기억, 국제 협력의 역사, 부산국제영화제가 축적한 문화 네트워크 등을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상시적 글로벌 플랫폼으로 제도화하고 또 발전시켜야 한다. 부산의 정체성은 피란과 연대의 경험 속에서 형성되어 지금도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신해양 산업과 다음 세대와의 연결’이다. 북극항로, 해양에너지, 스마트 물류와 같은 담론이 선언에 그치지 않으려면 지역의 대학과 연구기관, 청년 일자리 생태계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글로벌 전략이 지역의 미래 세대와 만나지 못한다면 그것은 허상에 가깝다.
부산은 역사적으로 흐름을 통과시킨 도시였다. 이제는 그 흐름을 축적하고 설계하는 도시로 전환해야 한다. 부산의 과제는 글로벌 도시라는 이름을 얻는 일이 아니라, 세계와 맺는 관계의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흐름을 통과시키는 항구에서, 관계를 설계하는 항구로’. 이 문장이 개항 200년을 향해 나아갈 부산의 새로운 선언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