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마지막 내시’라 불리는 송은(松隱) 이병직(李秉直, 1896-1973)은 그의 기구한 삶만큼이나 다양한 일을 하며 평생을 살았다. 조선의 쇠락과 함께 궁궐의 삶을 그만둔 이병직은 서화가로서 활동하며, 그동안 축적한 부를 바탕으로 서화골동 수집에 열을 올렸다. 그의 수집품은 그의 당호를 따라 고경당(古經堂), 또는 수진재(守眞齋) 소장품으로 불리며 명성을 날렸다. 훗날 이 소장품을 경매를 통해 판매하여 교육 사업을 하는 데 사용한다. 지금의 의정부고등학교, 효천초등학교가 그가 세운 학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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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직의 ‘석죽’. |
이병직은 종로 익선동에 살았는데, 1915년 해강 김규진이 운영하던 서화연구회 1기생으로 들어가 서화를 배우기 시작한다. 예민한 성격의 이병직은 뛰어난 솜씨를 드러내며 서화협회 조선미술전람회 등을 통하여 두드러진 활동을 보인다. 초기 이병직의 작품은 김규진의 필법을 그대로 이어받아 매우 활달한 필치의 글씨와 그림 솜씨를 보였다. 글씨는 힘센 기운을 보인 전서 예서를 썼고, 날아갈 듯이 활달한 행, 초서를 잘 썼다. 그림 또한 김규진 특유의 강건한 대나무 그림과 유연한 잎의 난초를 그렸다. 고암 이응노와 함께 김규진의 양대 제자로서 활동하던 이병직은 스승 김규진이 1933년 세상을 떠나자 큰 변화를 맞는다.
당시 미술계는 계보 학풍의 관습이 있어, 서화계의 거물인 스승을 중심으로 움직였다. 스승을 잃은 이병직은 새로운 인물을 따라 활동해야 했다. 이병직은 익선동에 살고 있었는데, 마침 그 이웃에 존경받는 서화인인 영운(潁雲) 김용진(金容鎭, 1878-1968)이 살고 있었다. 김용진은 안동김씨 명문으로 좋은 미술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수장가일 뿐만 아니라, 청나라 화풍의 영향을 받아 채색 문인화를 잘 그린 서화가였다. 당시 사회 관습상 잘 어울릴 수 없는 관계였지만, 서화 골동이라는 매개로 두 사람은 사제지간처럼 가까이 지냈다. 두 사람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며 이병직의 서화는 김용진의 서화를 닮아갔다.
글씨는 단정하게 변하고 문인화풍의 그림에는 청나라 화풍의 채색이 더해졌다. 거기에 자신만의 개성이 더해지며 이병직만의 전형적인 화풍이 만들어졌다. 내시 특유의 중성적 기질이 있어서인지 이병직의 글씨는 마치 여릿여릿한 여성적 필체를 닮아갔고, 그림 또한 얌전함으로 가득 채워진 모범 화보 같았다. 이 그림 또한 이병직 서화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반듯반듯하고 단정한 글씨, 괴석에 대나무와 죽순을 그린 안정된 구도, 괴석을 짐승의 머리처럼 그린 재치 등이 이병직 회화의 진수를 보는 듯하다. 인장을 찍은 모습조차도 한 치 흐트러짐을 허락지 않는 얌전한 작가의 모습이다.
이병직은 1960~70년대 삼청각, 대원각과 함께 서울 3대 요정으로 불리던 오진암(梧珍庵)을 경영하여 큰돈을 번 것으로도 유명하다. 궁중의 내시라는 신분의 불우를 딛고, 축적한 많은 재산을 교육 사업에 바친 사회사업가이며, 단정한 서화를 많이 남긴 뛰어난 서화가였다. 추상미술, 실험미술의 범람으로 복잡해지는 현대 미술계에서 반듯한 구상 미술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데, 이병직의 작품 같은 얌전하고 장식성도 있는 동양화에 많은 관심이 생겼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