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등을 둘러싼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은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전개된다. 국가나 기업을 막론하고 이 거대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되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생존의 중심에는 연구개발(R&D)이 자리한다. 매년 2월은 정부 각 부처가 그해의 연구 과제를 공고하는 시기다. 필자 역시 해양 벤처기업을 운영하며 혁신 기술 도전을 위해 분주히 움직이지만, 한국 R&D 현장의 실상을 보여주는 통계는 가슴을 답답하게 한다. 바로 우리나라 국가 R&D 성공률이 99%에 달한다는 수치다. 미국과 일본의 성공률이 30% 미만이라는 점과 비교하면 가히 독보적이다. 언뜻 효율적인 성과 같지만 그 이면엔 위험한 신호가 숨어 있다.
실패가 거의 없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실패하지 않을 안전한 연구’에만 매몰돼 있다는 증거다.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경직된 구조 속에서는 파괴적인 혁신 대신 기존 기술의 연장선에 있는 안일한 과제들만 살아남는다. 엄격한 감사와 책임 추궁이 뒤따르는 환경에서 공무원도, 연구자도 모험적인 선택을 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대한민국은 GDP 대비 R&D 투자 비중이 세계 최상위권이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세계 표준을 바꾸는 원천 기술을 얼마나 보유하고 있는지 자문해야 한다. 특히 해양 R&D 분야는 더욱 심각하다. 최근 유망한 자율주행 벤처기업이 촘촘한 규제와 보수적 인식에 가로막혀 해외로 거점을 옮긴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런 면에서 중미의 행보는 시사적이다. 중국은 국가 주도의 강력한 추진력으로 해상풍력 등 실증 사업에 사활을 걸어 세계 최고 기술력을 확보했다. 미국은 가능성 있는 기술에 민간의 천문학적 자금을 투입해 상상을 현실로 구현한다. 해양 산업은 연구실 안에서만 이뤄질 수 없다. 자율운항 선박이나 신공법 방파제 같은 기술은 반드시 실증 데이터가 뒷받침되어야 글로벌 경쟁력을 갖는다. 물론 인허가 기관의 보수적인 입장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공에 대한 확실한 인센티브와 제도적 면책 장치가 없다면, 우리는 영원히 ‘과거의 방식’을 답습하며 아무런 발전도 기대할 수 없다.
다행히 최근 해양수산부는 ‘시험시공제도’를 확립하고 글로벌 딥테크 과제를 신설하는 등 정책적 변화를 꾀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의지가 일선 하부 조직과 인허가 현장까지 확산되어야 실질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다. 필자는 최근 인도 정부로부터 수조 원 규모 프로젝트 참여 제안을 받았으나, 연간 시공 실적 요건을 충족하지 못해 고배를 마셨다. 우리 정부의 연구비로 개발한 신기술이 정작 국내 실적 부족으로 해외 진출에 발목을 잡힌 셈이다. 현장의 공무원들이 실패 두려움 없이 신기술을 채택할 수 있는 문화, ‘시험시공’이 ‘본 시공’으로 이어지도록 날개를 달아주는 문화가 정착돼야 비로소 R&D 예산이 혁신의 마중물이 될 수 있다.
내수 시장은 빠르게 위축되고 있다.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지 못하면 해양 엔지니어들의 일자리도 신기루처럼 사라질 것이다. 우리보다 앞서 고민한 유럽은 달랐다. 내수 한계를 독보적 기술력으로 극복했다. 해외 발주처와 협의하며 얻은 결론은 명확하다. 유럽이 닦아놓은 길에서 같은 방식으로 경쟁해서는 승산이 없다. 수백 년간 축적된 데이터를 단기간에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전혀 다른 방식의 혁신 기술이 필요하다.
동시에 ‘국내용 특허’에 안주하는 인식도 바꿔야 한다. 해외 진출 시 해당 국가에 특허가 없다면 독점권을 행사할 수 없고, 수익성 담보도 불가능하다. 국내 출원을 시작으로 국제출원을 거쳐 개별국 특허를 확보하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이를 통과해야만 지식재산권이라는 무기로 세계 시장을 선점할 수 있다. 해외에서 통하는 혁신 기술을 발굴해 넓은 바다로 나갈 때만 미래가 있다. 이 길은 기업의 생존을 넘어 해양 시장 주도권을 결정짓는 승자독식의 게임이다. 실패를 허용하는 용기 있는 R&D 정책과 강력한 지식재산권 전략만이 대한민국 해양 영토를 세계로 넓히는 유일한 열쇠다.